사색 쓰기

추억의 한페이지

난척 선생 2008. 1. 8. 11:38

36세, 작은 나이도 그렇다고 큰 나이도 아니다. 적게 산것도 아니요, 오래 산것도 아니다.

그야 말로 개그콘서트의 "같기도" 라는 프로처럼 이것도 같기도 저것도 같기도 한 것이다.

 

이 나이에 벌써 추억을 들먹이는 것이 딱히 어울리는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30년이 넘는 인생 속에 추억 한자락이 없을 수는 없는 일..

 

지난 주 주말, 집도 이사했고.. 해도 바뀌었고 해서

친구녀석 몇 얼굴을 모아 놓고 신년회가 아닌 신년회, 집뜰이가 아닌 집뜰이를 했다.

사실 지나고 보니 미안하기는 하다... 사람 불러 놓고 차린 거 없이 손님을 맞으려니...

그래도 구색을 갖춘 집들이를 기대했던 친구들은 실망이었겠지만...

 

각설하고, 이래저래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꽃놀이도 하다가...  

우연찮게 중학교 시절부터 모아왔던 편지가 들어있는 커다란 보관함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그날 내 앞에 있던 세명의 친구들의 편지들과 아내와 주고 받던 편지, 또 다른 친구녀석들의 편지가 뭉텅뭉텅 들어앉아 있었다.

 

우리의 기억이란 오래가지 않아서 그들이 언제 내게 편지를 보냈는지, 또 무슨 연유로 보낸 것인지를 그들은 알 수 없다. 심지어 내앞에 있던 한 친구는 자기는 결코 내게 편지를 보낸 역사?가 없다고 장담을 했다.

그말을 듣고 있자니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상자 속에는 친구의 기억 속에 사라졌던 추억이 잔먼지를 뒤집어 쓴채 상자의 제일 위쪽에, 그것도 총 4편의 편지가 묶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앞의 친구들에게 자신들이 15년 혹은 20년 전쯤에 쓴 편지들을 손에 쥐어주고 한번 읽어 보라했다.

그러자 또 다른 한 친구는 편지 봉투를 보며 놀라워했다.

"어.. 이건 내가 옛날에 썼던 편지 봉투네.. 근데.. 글씨체는 내것이 아닌데..."

하지만 그 글씨는 그 친구가 썼던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중학교시절 자신의 글씨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뿐이었다.

다들 호기심으로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자신들이 썼던 편지를 찬찬히 읽어보더니, 스스로..

마구 떠들어 대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 순간 오래된 편지라는 타임머신은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하게 사라진 흔적을 캐내고 있어 마치 그 기억들이 땅속에 묻힌 보물상장라도 되는 냥

사라진 기억을 열심히 불러들이고 있었다.

 

모두들 신기한 표정들 역력했고.. 잠시나마 그들은 행복해 보였고...

친구들을 바라 보는 나 또한 행복에 젖어 들었다.

 

나는 기억력이 친구들에 비해 좋다.. 뭐 그래서 이게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여간  기억력 덕분과 개인적인 기호때문에 나는 TV 만화영화 주제가를 아주 많이 기억하고 있다.

연말에 이 친구들과 부여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며 만화노래를 끝없이 불러주었다.

은하철도 999, 코난, 천년여왕, 빨강머리앤, 캐산, 그랜다이져, 마징가 제트, 마루치 아라치, 이겨라 승리호, 그랜다이져, 그로이져 엑스, 등등등 한 2시간을 나 혼자 노래를 부르며 떠들어 댔던것 같다.

중간중간에 당시 재미있었던 만화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서로 같은 나이고 같은 세월을 살아왔다는 공감대가 그 만화를 통해서 형성이 되었고.. 그것은 추억의 향수를 자극했고, 그 향수로 인해 잠시나마 짜릿한 행복감이 밀려와 좋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런 "추억의 한페이지"는 짜릿하고 그윽한 향수를 자극한다.

늘 향수에 젖어 산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가끔 그리고 잠시동안이라도 이런 향수에 빠져본다면

잊고 있었던 행복이란 것이 어떤 감정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감히 이야기 하건데 행복이라는 것은...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려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과 나와의 겪었던 경험(좋은 기억이던 나쁜 기억이건 상관없이)들을 공유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그래서 서로 공감을 할 수 있는 아주 짧은 순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사진, 일기, 기행문, 감상문, 편지 등등의 기록은

딱히 지금 이 순간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행복을 맛 보게 할 수 있는 잠재이다.

이런 기록의 역사는 마치 장이나 김치나 술이 그러하듯이 오래 묵으면 묵을 수록

그 진가를 발휘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우리는 머릿 속의 기억을 모조리 잡아 둘 수는 없다.

하지만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머릿 속에서 빛을 바래가는 기억들을

상자 속에 자알 보관해 둘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그 상자는 당신들의 보물상자가 될 수도

그 안에 든 기록들은 여러분들에게 짧은 행복을 선사하는 보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나 또한 가끔 추억의 한 페이지를  넘기며 잠시나마 행복에 빠져든다..

    특히  내가 고등학교나 대학생때 쓴 일기를 읽게 될 때 느끼는 것은

    놀랍게도 나 자신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거다.

    스스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여기지만 그 기록들을 읽어보면 예나 지금이나

    내가 지니고 있는 근본 철학들은 여전히 녹아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곤 한다.

   

    지금 지니고 있는 생각을 나는 10년전 15년전에도 하고 있었다는 거다.  

    어쩌면 20년 뒤에도 나는 이 블로그에 남긴 기록을 들여다 보며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오호! 내가 이런 말을 했단 말인가!!

    쩝! 별로 변한게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