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쓰기

야구를 시작할까보다...

난척 선생 2009. 8. 27. 16:13

 

중학생이 되기전 그러니까... 국민학교 시절에 여러가지 놀이 중에서 으뜸은 야구였다.

82년도 봄,  전두환 대통령의 힘찬 시구와 함께 이땅에서 처음으로 프로야구가 그 서막을 올렸고,

사람들의 관심은 이내 OB 베어즈, 삼성 라이온즈, MBC 청룡, 해태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 삼미 슈퍼스타즈 등의 6개 구단으로 집중이 되었다.

정말 그 당시엔 어른아이 할 것없이 모두 다 프로야구라는 새로운 문화에 열광을 했고,

특히 어린아이들은 야구베트, 글러브 등을 어렵사리 구해 동네 공터에서 던지고 받고, 치고 달리고 했더랬다. 또한 각 구단의 어린이 클럽에 가입을 하여 화려한 구단의 마스코트가 그려진 티셔츠나 모자, 점퍼등을 입고 자랑스럽게 등교길를 활보하던 그 시절...(사실 나도 어린이 클럽에 가입을 하긴 했었다. 근데 그 가입한 클럽이 문제였다. 만년 꼴지만 하던 팀, 삼미 슈퍼스타즈!! 아이들에게 인기좋았던 MBC청룡이나 OB 베어즈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역연고인 삼성 라이온즈나 롯데 자이언츠도 아니고, 으~~ 하필 슈퍼스타즈라니... 하지만 어쩔수 없었다. 아버지가 삼미특수강에 다녔기에 이건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1982년 프로야구의 원년 그해 코리언시리즈에서 베어즈가 우승을 하면서 

박철순, 김우열, 윤동균, 신경식 등의 베어즈 선수들은 어마어마한 인기였다. 베어즈가 롯데와 원정 경기를 위해 마산에 내려오면 지금은 없어진 마산 크리스탈 호텔에 묵었는데... 그 앞에서 베어즈의 선수들의 싸인을 받겠다고 기다려서 결국 김우열과 윤동균의 싸인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하여간 당시 프로야구는 정말 많은 국민의 관심을 받았었고 같은 해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김재박과 한대화의 멋진 작픔으로 야구는 일약 전국민이 좋아하는 스포츠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말 많은 관심이 야구에 쏟아졌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이들은 관심을 넘어 열광을 했었다.

사내아이들은 그때부터 방망이와 글러브를 끼고 동네공터로 나와서 공을 던지고 받고 치고 달리고 했었다.  

 

나 같은 경우는 외삼촌 덕분에 야구 글러브를 일찍 손에 쥐었고, 또한 야구선수였던 사촌 덕분에 질 좋은 야구 글러브를 다량(왼손글러브, 포수 글러브, 외야수 내야수 글러브 등 자그마치 5개의 글러브)으로 가지고 있었더랬다. 그러기에 동생과 내가 없다면 동네야구는 진행이 될수 없을 정도였다.    

 

현재는, 롯데가 지던 삼성이 이기던 프로야구에 별 관심이 없지만

그 시절엔 야구선수가 되어야 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정도로 야구에 대해 열성이었다. 심지어는 야구 교본을 참고하여 슬라이딩 하는 요령을 동네 아이들과 함께 잔디밭에서 열심히 연습을 했고, 난해한 야구 규정도 책을 통해 익히기도 하고, 또한 커브와 슬라이드.. 박철순이 던지던 너클 볼을 어떻게 쥐고 어떻게 던지는 지를 나름 연구해서 던져 보고, 캐치볼 연습도 하였다. 나는 주로 동네에선 투수를 했으니까(순전히 야구 글러브가 많이 있었기에 내가 투수를 한다고 하면 말릴 친구가 없었다), 동네 에이스로서 볼 컨트롤 연습도 무지하게 많이 했었다.

 

그렇게 열심이었는데...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부터 야구는 점점 내게서 멀어졌다.

그것은 아마도 또래, 즉 학급 친구들이 더이상 야구를 하고 놀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야구와 멀어질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중학생이 된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동생들과 야구를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었다. 더이상 예전처럼 국민학교에 다니는 동네 동생녀석들과 예전처럼 우르르 몰려다닐수는 없는 일이었다.

요즘에도 초등학생과 중학생에서 예전처럼 그런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국민학생이란 타이틀과 중학생은 심리적으로 아주 큰 차이가 엄연히 존재했고, 놀이 문화도 완전히 달랐다.

즉, 더이상 연날리기, 잣치기, 딱지치기, 오징어 땅콩 등등 이런 무수한 놀이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아무도 이런 놀이를 즐기면 안된다는 말을 하는 어른은 없었지만 당시 우리 또래는 중학생이 되면서 부터는 놀이문화와 완전한 결별을 해야 했던 것이다.(몇번 생각해봐도 국민학생에서 중학생으로 바뀌면서 일어난 놀이 문화의 단절은 늘 아쉽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후로 나는 야구는 그저 스쳐지나가며 텔레비젼을 통해 보여지는 야구일 뿐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동아리 활동을 선택하려 했을때 야구부에 들어갈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내 시들해져 결국 대중음악 동아리에 들어갔고... (여기에 왜 들어갔는지... 아쉽다.. 지금 생각하면 훨씬더 내게 유익한 동아리들이 많았을 텐데... 아쉽다.)   

이렇게 야구의 재미는 잊혀진 듯 했다.

그러다가 92년인가? 롯데가 천신만고끝에 플레이 오프에 들어가서 아주아주 극적으로 우승까지 하게 되었을 때 잠시 야구는 희열을 주었고...

98년 우리나라 경제도, 나자신의 상황도 암울한 시기에 동갑내기 메이져리그 박찬호는 그해 7월의 투수가 되었고, 뒤틀린 일상에서 야구는 내게 한가닥 햇살을 비쳐주었다.

 

아! 야구에 대한 짜릿한 기억 하나가 있다.

국민학교 이후 야구를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는데..  

떡한번, 대학교 3학년, 학과 내에서 야구시합을 했는데...

그때 아주 큰 홈런을 쳤던 기억... 생각하면 할수록 짜릿하다.

 

그리고

밋밋하게 두리뭉실하게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인 야구클럽에 들어오라고 했다.  

한달 뒤쯤...

문득 

그 친구 말이 머리속에 걸려 낭창거리기 시작했다.  

야구! 야구!

야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