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쓰기

함께 그리고 역시 홀로 간다 - 겨울, 한라산 둘레길 기행

난척 선생 2016. 6. 28. 18:22

가족을 일군 후 가장인 나는 '홀로'에서 '함께'가 되었다.

그리고 "함께"는 내게 책임과 안정감을 주었다.

함께지만 결국,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홀로 갈 것이다.

혼자하는 것에 익숙한 편이다. 그렇다고 혼자를 좋아하고 선호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인에 비해 혼자에 익숙한 편이라는 말이다.

함께지만 가끔 오롯이 혼자이고 싶은 때가 찾아 온다. 그런 순간은 서서히 그리고는 불쑥 찾아든다.        

 

 

 1월과 며칠 전, 홀연히 제주를 다녀왔다. 

내 안에 어떤 바람이 일었는지를 딱히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고,
어쨌든 제주도에는 내가 아직 오르지 못한 한라산이 있었고, 
평일 하루 휴가를 낸다면 당일치기로 한라산을 오를 수 있을 터였다.

지난 1월의 어느 날, 문득 눈 덮힌 한라산을 보고 싶었다. 
첫비행기와 막비행기를 예약하고 새벽에 홀로 집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새벽, 공항을 향해가는 마음은 덤덤하기도, 또 약간 설레기도 했다.

기내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비행기는 쿨럭거리며 제주공항 활주로에 착륙하고 있었다. 날씨는 흐렸고 눈발이 약간 흩날렸는지도 모르겠다. 
재빠르게 공항을 빠져나와 제주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눈덮힌 한라산을 그려보았고, 참 오랜만에 온전히 나홀로 여행이라는 생각에 아이처럼 얼굴이 활짝 피어올랐다.

 삶이 뜻한대로 다되는 것이 아니라는 건 이제 익숙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아니나 다를까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창구에서 표를 발급하는 여직원은 심드렁하게 귀찮다는 표정으로 
"오늘 한라산은 전면 입산금지입니다" 라고 했다.
나는 재차 여직원에게 그게 사실인지를 물었고, 여직원은 한숨을 쉬더니 간밤에 내린 눈으로 모든 등산로가 폐쇄되었다고 했다. 
순간 당혹스러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마트폰으로 한라산 일기예보를 보았고, 그도 모자라 한라산국립공원에 직접 전화를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역시, 눈으로 인해 한라산 입산이 전면 통제되었다는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입산통제가 되었어도 다른 경로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지만.... 

적어도 눈덮힌 산에서 얼어 죽을 만한 각오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터넷으로 오름과 둘레길을 검색해보았다. 
한참을 뒤적이다가 마침내 내가 원하던 길고, 험하고, 멋진 모험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가장 아름답다는 사려니 숲길에서 돈내코로 이어지는 한라산 둘레길


"좋다! 그곳으로 가서 8시간 정도를 걸어보자!"


 다시 소풍가는 아이처럼 가슴이 부풀었고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한라산 중턱인 사려니 숲길에 도착했을 땐 눈발은 제법 굵어져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한라산이 통제되자 나처럼 이 둘레길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일행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샤려니 숲길을 젠걸음으로 밟아 나갔다. 
나는 주변을 살피며 상기된 표정으로 살포시 눈이 덮힌 길을 차박차박 내딛었다. 



멋진 길이 이어졌고 기분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1시간 반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가자 '월든'이라는 명칭이 나왔고... 그곳에 갈림길이 있었다. 
갈림길은 바리케이트로 출입통제된 길과 사람들이 앞서 지나간 붉은 오름으로 빠져나가는 길로 갈렸다. 
문득, 헨리데이빗 소로우를 떠올렸고.. 나는 뒤에 오는 몇몇 사람을 쭈뼛쭈뼛 먼저 보낸 뒤 
정말 소로우라도 되기라도 한 것처럼, 무슨 간첩처럼, 

아무도 그 겨울을 들이지 않았을 통제구역을 향해 가슴을 졸이며 숨어들었다.      

굽어진 길을 돌아가서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없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현위치를 확인하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지도앱을 열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휴대폰 배터리의 전원이 꺼져 버렸다.

경고인가? 약간의 불안이 엄습해왔지만 애써 걸음을 내딛었다.
몇 백미터를 더 나아가자 이번에는 큼지막한 팻말들이 또다시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2km 앞 길 없음, 출입시 벌금 20만원"

"아! 길이 없다고.." 

 

벌금은 무섭지 않았으나, 길이 없어 진다는 말에 조금 무서워졌다. 


"분명, 군데군데 세워진 표지판에서 이쪽으로 난 길이 있음을 확인했는데... 길이 없다니..."


잠시 망설이다... 결국 큰 길을 버리고 좁은 소로를 택하기로 했다.

길이 없다고 하니... 길을 버려야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소로를 따라 20분 정도 걸어가자 버섯 농장이 나왔고 길을 가로질러 철사줄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어 사람들을 출입을 막고 있었다.

 

"버섯농장을 지나면 다시 길이 나오겠지..."

 

불안이 조금 더 파고들었지만 그대로 농장을 관통했고... 희미하게 나마 길이 보였다.

다시 길인지, 길이 아닌지 아리송한 길을 따라 점점 깊숙히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숲속으로 파고들고 나서야 마침내....

길이 없음을 확인했다. 

당혹스러웠고 확실히 불안했다.  

왔던 길을 돌아가려 했지만 내 머리 높이까지 자란 나무들와 주위가 눈으로 뒤덮혀 있어 그 아리송한 길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은 40분 정도 지나있었고... 주변을 조심스레 살펴가며 내가 왔던 방향으로 더듬어 나갔다. 

전원이 꺼져버린 휴대폰을 지닌 채 산에서 길을 잃게 되자... 조난에 대한 생각이 한두 차례 밀려왔고, 덜컥 겁이 났다.

십여분을 헤맨 끝에 다행스럽게도 철사줄로 둘러쌓인 버섯농장을 다시 발견했고,

20분 뒤에 "2km 앞 길 없음, 출입시 벌금 20만원"이라고 적힌 팻말 앞으로 회귀했다.

그렇게 1시간 정도를 길 아닌 길에서 빠져 나왔을 때, 나는 심리적으로, 체력적으로 지쳐있었다.
아침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해 금새 허기가 졌고, 목이 말랐다.  
팻말을 마주하고 서서 잠시 망설였다. 

 

"2km 앞에서 길이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 큰 길이 그냥 끊어 질리가 없다. 계속 가보자..."

 
그렇게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약 2km를 더 걸어갔다. 짐작대로 길은 이어져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쉬어 갈 수 있는 벤치가 눈에 띄었다. 

초장부터 지친 마음과 허기를 달랠겸 배낭에서 쵸코바와 사과 한 알과 아침에 끓인 커피를 꺼내먹었다.

온기와 당이 몸 안으로 들어가자 기분이 안정되고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겨우내 아무도 들인 적 없을 것이 분명한 길을 향해 착착 걸어 나갔다.   

 

문득 나무 사이로 작은 플래카드가 매달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멧돼지가 출몰하니 조심하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등산길에서 이런 문구를 흔히 접하던 터라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인적이 전혀 없는 이곳에서 멧돼지 경고 문구를 접하고 보니 팽팽하게 긴장이 당겨왔다.

 

바람 소리만 휘휘거리던 적막한 길,

한참동안 시선은 고작 몇 미터 앞에 펼쳐진 길만 붙들고 걸어 나갔다.

그때 갑자기 잡목이 우거진 숲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푸다닥 뭔가가 내 앞을 지나갔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앞을 향해 걸어나가던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다행이 멧돼지가 아니라 노루였다.  

이내 마른 풀이 흔들리며 부스럭 소리를 내더니 이내 새끼노루 두마리가 겁 먹은 얼굴로 덤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는 조금 떨어진 덤불에서 곳에서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내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돌았다. 코 앞에서 노루를 보다니..

나도 나였지만, 사람이 들지않는 이곳을 사는 노루가족이 더 놀랐을 거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노루들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걸었고 걸었다. 그저.. 앞을 향해....

12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비로소 출입통제된 숲 길을 통과했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걸 알수 있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또다른 길이 이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오늘은 눈이 와서 이 코스의 둘레길을 다니는 사람이 없구나.."

 

허기가 졌고, 가지고 간 즉석 발열밥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간식을 먹고, 커피를 먹었다. 그리고 또다시 길을 걸었다.

길은 좁았다가 넓어졌다가 곧았다가 굽었다가를 반복했지만 여전히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고... 잠시 그쳤던 눈발이 흩날렸다.

시야가 날리는 눈으로 흐려졌고 서서히 피곤이 찾아 들었다.

눈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둘레길의 흙색과 주변의 초록색을 서서히 지워나가고 있을 무렵에는, 그 전까지 간간이 머릿 속을 스쳐가던 생각마저도 말끔하게 지워나갔다.

 

그 무렵이었다. 길 위에 꼿혀 있던 시선을 거두어 정면으로 향했을 때,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거의 기절할 뻔했다. 갑자기 내 시야를 가득 채운 채, 검은 형채가 내 왼쪽어깨를 스치듯 지나가고 있는게 아닌가?   

사람이었고, 남자였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에에 덩치 큰 남자가 유령처럼 내 영역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무미 건조하게 휘적휘적 눈 길을 해쳐 나아가고 있었다.

한참 전에 보았던 노루에서 느끼는 공포심의 강도 보다도 몇배는 더 깊고 컸다.

뭐랄까... 마치 귀신을 본 듯한 느낌이랄까... 인적드문 곳에서는 어떤 존재보다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있는데,

정말 그랬다.  

 

네 시간 만에 처음 본 사람이었는데... 마치 귀신처럼 지나치다니..

순간 공포심이 들어 당황했고, 잠시 얼떨떨했다.

하지만 공포심은 금새 지워졌다. 눈이 길을 지워나가 듯 사람의 감정도 지워버리는 것일까..

 

다시 눈 길에 발도장을 꾹꾹 찍으며 앞으로 나갔고, 흩날리는 눈은 제법 쌓이기 시작했고, 

흐린 날 덕분에 사위는 허옇게 변해 고적하고, 아득했다.

 

그렇게 두세 시간이 흘렀을 때, 수악에 도착했고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제법 큰 도로를 만났다.

그 무렵 시간은 3시 30분경이었고, 이제 눈은 작정한 듯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살짝 덮인 도로를 가로지르고 나자 텅빈 안내소가 나왔고, 나는 그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선채 망설였다.

" 2시 30분 이후 입산 금지" 라고 경고 문구가 빨간색으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고...  

 나는 결정을 해야 했다.

수악에서 돈내코까지 2시간 40분이 걸리다고 하니 좀 더 속도를 낸다면 2시간 내에 가능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오늘 하루 시작부터 금지라는 팻말을 무시하고 지나쳐 왔으니.... 일관성있게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누가 볼까봐 서둘러 눈 덮힌 산을 올랐다.

다시 10분이 지났을 때 플래카드 하나가 또다시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멧돼지 출현이 잦은 지역, 혼자 다니지 마시오"  

 

아! 이런.. 앞선 안내 문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정확히 내게 해당되는 문구였다.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으나 기세가 있었다. 경고를 다시 무시하고 그냥 돌파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기세였다. 

하지만 한라산 중턱은 슬금슬금 어둠이 밀려드는 듯했고, 눈발은 더욱더 요란해져서 산길을 완전히 뒤덮고 내가 지나온 발자국만이 움푹 패어 있어 기괴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는 달리 완전히 오르막인 산길이었고.. 체력은 현격하게 떨어졌고,에너지는 거의 방전이 되었다.

30분을 힘겹게 오르고 나자 아래께에서 부터 허기가 바짝 밀려들어왔다. 그 자리에 선채 배낭에서 쵸코바를 꺼내 먹으며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들었던 새소리나 바람소리도 사라지고 오르지 싸르락 싸르락 눈 내리는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는데... 등줄기가 시큰해지며 겁이 덜컥 났다.

 

 "6시까지 돈내코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이러다가 아무도 없는 산에서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쵸코바를 급하게 먹는 동안 이런 생각들이 스쳐지나 갔지만... 다시 눈덮힌 산을 푹푹 올라갔다. 

20분 정도가 지났고 또다시 허기가 졌다. 배낭을 뒤져 크레커와 사탕을 차례로 입안에 쑤셔 넣었다.  

눈길을 비틀거리듯 올라 갔고, 또다시 20분정도 지나갔을 때

표지판을 보았다... 5.4km가 남아있었고 시간은 4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대략 계산해보니 한 시간 넘게 산을 올랐는데..아직 3km를 채 오르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빛이 희미해지고 어둠이 저만치에 다가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리근육에 힘이 풀렸고, 순수하게 겁이 났다. 

그때까지는 내 머릿속은 온통 6시까지 돈내코에 무조건 도착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산을 꾸역꾸역 오르는 일외에는 다른 대안은 생각을 할 수 없었는데, 바로 그때서야, 문득 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겁을 제대로 집어 먹자, 결정은 빠르게 났다.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오르막에 다리에 힘을 풀린 상태에서, 되돌아 산을 내려가는 것이 현명한 결정이었다.  

30분을 내려가 5시가 되자 주변은 제법 어두워졌고.. 다시한번 잘한 결정이라 스스로 위안을 했다.

발길을 돌린지 한 시간만에 입구에서 보았던 안내소를 지나 산길을 빠져 나왔을 때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8시간, 32km미터의 둘레길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도로를 보았다.

산을 가로지르던 아스팔트색 도로는 2시간 30분이 지난 지금 완전히 하얀 눈으로 뒤덮혀 있었고, 그 위를 이동하는 차는 좀처럼 볼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도로 아래쪽에서 비상 깜박이를 켜고 정차해 있는 RV차를 발견하고는 다짜고짜 달려갔다.     

그리고 여차저차 하여 버스가 다니는 길까지 실려 왔고,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에 기사식당인 '현옥식당'에서 맛있는 두루치기 정식을 개눈 감추듯 비웠고,

속 시원해지는 맥주를 쭈욱들이 켰고, 비행기를 탔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함께라는 사실에 깊히 안도했고..

가족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어제보다 좀더 사랑스럽고 예쁘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자고 있던 아이들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고, 눈을 감고 그날의 하루를 떠올려 보았다.

다소 무모하기도 했지만 오롯이 혼자였던 그 하루가 아주 만족스러웠고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5개월 지난 6월 15일, 나는 또한번 '함께'를 뒤로하고, 날씨 좋은 날, 날아갈 듯 가벼운 마음으로  

한라산을 '홀로' 올랐다.

그리고 그날 밤, 또다시 따듯하고 익숙한 가족들의 곁에서 '함께'가 되었다.

   

 

 

 

     <샤려니 숲길과 수악길 지도> 


 

[정보]한라산둘레길 코스 설명, 지도 및 교통 안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