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척 선생 2020. 2. 15. 17:53

 2020년 2월 14일 그러니까 오후 3시경, 카톡으로 다음과 같은 메세지가 전해졌다.


 "사랑하는 동기들아! 오늘 입사 20주년 축하한다.

강산이 두번 변하는 동안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20년 동안 잘 살아 온것 같다.

다들 고생했다." 


 오늘은 그저 해마다 돌아오는 발레타인 데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랬다! 오늘은 내가 입사 한지 꼭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불쑥 찾아든 메세지를 읽고는 마치 뭔가 둔탁한 망치같은 것으로 가슴 한켠을 한대 얻어 맞은 기분이 되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딱히 기쁜 것도, 그렇다고 슬픈 것은 아닌데, 뭔가 씁씁한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말로는 표현하기가 어려운 뭔가 찹찹한 심정이 일순간 일어났다.

 

 "그래, 벌써 20년이 흘러갔구나!"


 회사 업무를 쉴새없이 쳐내다 보면 한주는 차창밖 가로수처럼 휙휙 지나가고, 한달은 도마 위에서 칼치가 토막나듯 어느새 툭툭 잘려 나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듯 일년이 저물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꼬박 20년을 넘어왔다.   


 2000년 2월 14일, 종로에 있는 본사 광화문 빌딩 앞의 아침은 제법 쌀쌀했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던 대기는 상쾌하고 달콤했던 느낌이었다. 아마도 새로운 출발에 대한 설레임과 긴장과 함께 지금의 아내가 챙겨준 미니쉘 쵸콜릿이 입안에서 천천히 녹고 있어서인지, 시린 아침추위는 적어도 내게서 만큼은 멀찍이 떨어져나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바로 오늘, 문득 맞이한 20년의 시작은 이랬다. 그리고 어떻게 지나온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승진을 하고, 이사를 하고, 또 아이를 낳고, 또 승진을 하고, 그렇다가 사방이 투명한 콘크리트 같은 외딴 곳에 홀로 같힌 답답한 시절을 버텨내기도 했다. 사실 이런 직장생활의 일련의 과정을 지나오며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면, 직장에서 "일을 통한 보람"이나 '자기실현'과 같은 따위의 의미심장한 말들은 현실에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모두가 이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이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오히려 직장에서 보람이라면 매달 같은 날짜에 송금되는 급여였고, 이따금 전해지는 상여금이었고, 이를 통해 내 사랑하는 가족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음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일 것이다. 그리고 상사나 동료들의 진심어린 인정은 가뭄에 콩나듯하여, 인사치레의 칭찬이나 인정을 혹시라도 받을 때면, 되려 어색하고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때가 많았다.

그보다는 질타와 은근한 압력이 휠씬 더 익숙해졌고, 상사나 함께 일하는 이들로 부터 욕먹지 않기 위해 애써왔던 나날들의 기억에 무게가 더 실리게 되는 것은 자본주의 아니, 경제활동이 일어나는 세상이라면 대부분의 직장인들이나 사업가들이 무의식 중에 취하고 있는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초년병 시절에는 일을 하면 그저 잘 하려고 했었다.(지금도 잘하려 하지만 젊은 시절 패기는 없는 것이다.) 제법 패기가 있었고, 열심히 하면 잘될 것이다. 아니, 잘되는 것을 넘어서 위로 쭉 상승할 것이라 믿고 있던 때가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정교하지만 냉정하게 흐르고, 나이가 들고, 직장에서 이제 중견이라는 묵직한 무게를 느끼게 되었다.     

다소 씁씁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어쩌면 욕먹지 않기 위해 버텨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에 좀더 무게가 실리는 것이다.

그저 버텨내고 있다는 방어적이거나 다소 부정적인 생각에 물들어가는 것에 처음엔 좀처럼 동의되지 않았으나 세월이 겹겹이 쌓일 수록 그것이 주는 무게에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이가 이렇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또한  이런 내 생각이 옳다고도 믿지 않는다.       


 그래도 이 소중한 직장에서 지난 20년간 부끄럽지 않고 떳떳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집 가훈인 "정직하게 성실하게"이다.

비록 회사에 크나큰 기여는 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지난 20년동안 여기 이곳에서 비겁하지는 않았고, 제법 정직했고, 성실했다고 감히 자신한다. 상사나 동료는 모를 수도 있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나에게 자신한다, 지난 20년 정직했고, 성실했다고...      


우리는 살아가는 것일까, 살아 지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다.

때로는 살아 가기도 하고 어느 시점엔 그냥 살아 지기도 한다. 

삶이 살아가든 살아지든, 이따위 철학적 물음과는 별개로 내 직장동기들을 비롯한 40대의 가장이라면 모두들

오늘 이 하루도 모두들 입술을 꽈악 깨물고 직장에서의 생을 버텨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내가 아끼는 친구들, 그리고 20년간 소중한 직장에서 부지불식간에 함께한 동기들,

그간 다들 고생했고,

앞으로도 15년 더 훌륭하게 버텨내자. 때로는 버티는 그 자체가 아름다워 보일때가 있으니까.. 힘겨워도 낙심하지 말자.

그렇다 하더라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적어도 비겁하지는 않게.


* 동기들! 20년 넘긴 것을 다시한번 진심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