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쓰기

가끔은 당신의 본질을 만나고 싶다

난척 선생 2023. 3. 9. 17:08

가까운 이들과 한 번쯤은 ‘너와 나의 이야기’로만 대화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서로의 거죽은 잠시 저쪽에다 벋어놓은 채 각자의 고갱이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때가 어쩌다 생긴다는 말이다.
직업이나 가족 같은 주제는 고이 접어두고서, 너와 나의 본질에 대해 꼭 한 번은 이야기하고 싶다는 말이다.
 
물론 ‘직업과 가족’이 우리의 상당 부분을 대변하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직업이나 가족이 우리의 전부나 근원까지는 아닐 것 같다.
어쩌다 가까운 이를 만나면 먹고사는 밥벌이 이야기나 자식 이야기 등으로 기껏 서너 시간 정도를 보내고 오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이야기도 분명 당신의 이야기고 당신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 너머에 숨겨져 있는 너와 나의 본질과 정체성을 오롯이 마주하픈 간절한 순간이 있다.

대화를 하다보면 문득 그의 본질이 아닌 피상적인 것들이나 그의 대리인과 마주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기도 하는데, 이럴 때면 서로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왠지 공허하게 느껴지거나 피곤하게 여겨질 때도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한번 정의해본다면 그것이 직업과 가족에만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본모습은 우리를 둘러싼 이런 테두리가 하나하나 덜어내어 진 후, 홀로 무방비로 남겨졌을 때, 그때 비로소 발현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므로 간혹 가까운 이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을 때가 있다.

당신은 뭘 좋아 하시는지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당신이 싫어하는 건 뭔가요?
당신의 본모습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상대에게 내 본질을 내보이게 되는 것에 대한 피로감은 상당하다. 이런 까닭에 서로의 테두리를 애써 허물지 않은 채로, 그저 이대로도 그만이라 여기며 쉽게 체념하고는 위의 질문들을 씁쓸하게 차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빛의 속도감을 체감하는 요즘, 타인의 본질 따위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드물 것이다.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다 만나서 술을 마시게 되고, 너와 내가 교차되는 시점이 우연하고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때까지 너와 나는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각자의 공간에서 서로 다른 색으로 분리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평생 교차점이 없이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이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애써 서로의 본질을 마주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밥벌이에 서로 바쁜 너와 내가 아니던가.

다만 아주 가끔씩
서로의 본모습을 마주하고 싶은 때가 있을 뿐인 거다.
가끔 씁쓸하면 될 일이다.
뭐, 괜찮기도 하고 견딜 만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