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 널 부를 때
차창 밖으로 엷은 저녁이 서서히 밀려들기 시작했다.
퇴근길이었고 해안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스피커에선 아하의 대표곡 ’Take on me'의 화려한 전주가 흘러나왔고, 그 리듬에 맞춰 핸들 위에서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건너편 산 허리춤에서 하얗게 피어난 산목련 두 그루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을 때였다.
갑자기 뭔가가 가슴께로 훅하고 달려드는 듯싶더니 곧장 아랫배로 철썩 내려앉았다.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원인도 이유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거다.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은 E.L.O의 'Last train to London'으로 바뀌었지만 기분은 바닷속으로 내려진 닻처럼 아래로 아래로 침잠하고만 있었다.
친구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몇몇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그런다고 해서 시커먼 심연으로 가라앉은 닻이 쉽게 끌어올려질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1분이 흘렀을까, 가만히 마음을 살펴보니 내 안으로 달려든 그것은 '순수한 외로움'이었다.
이는 혼자라서 외롭다거나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어 쓸쓸한 감정과는 결이 다른, 인간이기에 한 번쯤 느끼는 근원적인 쓸쓸함과 외로움, 그러니까 김현승 시인이 표현했던 ‘절대 고독’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것이 내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저 하얗게 핀 산목련을 한번 쳐다보았을 뿐인데.
왜일까. 그것이 느닷없이 내 안으로 달려든 이유는.
다시 차분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이유라고 할 만 것이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랐다.
오늘 퇴근길에 엄습한 '외로움'은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이봐, 친구.
살면서 지금같은 순간이 찾아들면 몹시 당황스러울 거야. 어쩔 줄을 모르겠지. 아마 그럴 거야.
쉽지 않겠지만, 그럴수록 침착하게 주변을 돌아봐.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봐.
그러면 느낄 수 있어. 너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순수한 감정을.
그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그저 순순히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된 거야, 친구."
존재의 고유한 외로움 같은 것이 무의식 저편에서 잠수함처럼 불쑥 솟아오를 때
그걸 느낄 수 있고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기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목련처럼 하얗던 이십 대에도 근원적인 외로움이 가슴을 파고들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이를 외면하려 했거나 벗어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오늘, 외로움은 내게 가만가만 귀 기울여 보라고,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을 걸어왔다.
'지금 이 순간은 네 속에 고유한 외로움과 쓸쓸함 속으로 빠져들 시간.
영롱한 외로움은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
눈물이 나려 할 때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무너져 내릴 때는 그대로 휩쓸려 버려라.
그리고, 그걸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라.'
정말, 이런 순간은 함부로 오지 않는 법이니 감사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면 고독은 고독으로 맞이해야 할 것 같았다.
하여, 멜론에서 박학기의 '향기로운 추억'을 검색했다.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첫 소절부터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한 줄 젖은 바람은 이젠 희미해진 옛 추억
어느 거리로 날 데리고 가네
원시의 내 모습과 마주치게 되는 순간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오늘 이 순간이 소중할 따름이다.
생각해 봐요. 눈이 많던 어느 겨울
그대 웃음처럼 온 세상 하얗던
귀 기울여 봐요. 지난여름 파도소리
그대 얘기처럼 가만히 속삭이던
외로움을 더 이상 부정적인 감정으로 대하지 않기로 하자.
본디 외로움은 우리의 순수한 감정 중에 하나일 테니까.
외로움이 나를 부를 땐 순순히 그 외로움을 따라가 보는 거다.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시니까 말이다. (정호승의 시 '수선화에게' 중)
'향기로운 추억'은 이제 끝이 났다.
나는 장필순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를 검색하고 조용히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이내 차 안엔 외로움의 파도가 일렁대며 깊은 바다가 들어찬다.
널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씩
식어가고 있어
문득 순수한 외로움을 알 것 같은 사람과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와 마주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내가 동경해 오던 작가인 그에게 언젠가 창원에 오시게 되면 꼭 술을 사겠다는 메시지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와는 얼굴 한번 마주한 적 없는데도 말이다.
외로움이 익으면 그리움이 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