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있어서 고마워요.
최근 들어 가장 좋지 않았던 하루가 바로 어제였다.
그제 밤, 평소보다 1시간 정도 잠이 부족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피곤했다.
오후에는 몇 달 동안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한 사람의 악성민원 때문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정신을 부패하게 만드는 쓰레기 더미들은 그때그때 머릿속에서 말끔히 치우려고 했지만, 무의식의 어딘가에서는 계속되는 악성민원이 썩어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악취가 풍겨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시간 뒤에는 상사로부터의 결정타가 날아왔다.
전화로 상사에게 15분 동안 질책을 들어야 했으며, 겨우 통화를 끝내고 나서는 완전히 심해의 검은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긴 침묵이 흘렀고, 퇴근시간이 되었고, 곧바로 퇴근을 했다.
숙소로 오는 중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맥이 풀렸버렸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퇴근 후에 이어지는 루틴이 있었으나 도무지 의욕이 나지 않았다.
저녁도 먹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기에 샤워를 하고 나서,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햇반을 데워 먹었다.
냉장고 한쪽에 먹다 남은 소주가 보이길래, 반주로 마셨다. 술이 들어가자 팽팽했던 머릿속이 느슨해져 왔다. 그렇게 대충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바로 쓰러지듯 잠을 잤다.
어두운 창밖으로 2주 가까이 지루한 장마가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밤은 유난히 휭휭 바람이 휘몰아쳤고, 창틀이 쉴 새 없이 드르륵 드르륵 뒤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가슴으로 바람이 스며드는 듯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알람 소리가 울렸고 선잠을 깼다. 컨디션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어제의 기분은 오늘도 다시 이어졌고, 몸과 마음이 여전히 무거웠다.
출근을 했고, 꾸역꾸역 일을 했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혼밥을 하게 되었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아내의 목소리는 밝았다.
어제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과 장마처럼 우중충한 기분을 아내에게 늘어놓았다. 짧은 위로의 말이 전해졌고, 잠시 뜸을 들이던 아내는 내게는 좀 미안하지만, 아내는 어제오늘 기분이 꽤나 좋다고 말했다.
그건, 며칠 전 끝난 아들의 기말고사 결과가 꽤 좋아서이고, 또 시험을 차근차근 준비한 아들의 노력에 걸맞은 결과가 나와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들이 전해 준 학교 소식(각 과목 선생님으로부터 아들이 들었던 칭찬)을 하나하나 유쾌하게 이야기했다. 순간 아들의 이미지가 떠오르며 빙그레 웃음이 돌았다.
혼밥이어도 어색하지 않은 국밥집에서 순대국밥을 주문하고 기다리다가, 문득 오래도록 사업체를 꾸려가고 있는 한 친구가 떠올랐다.
아마도 친구가 지금까지 정말 어려운 상황을 여러 번 맞았을 텐데, 훌륭하게 잘 견뎌냈을 거라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다.
그냥,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고, 나와 비교해 볼 때 친구는 '밥벌이의 내공' 혹은 '세상살이의 내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한 꺼풀 한 꺼풀 쌓으며, 심도 깊게 살아내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진심을 담아 친구에게 '넌 잘 살았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점심을 먹고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하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밥은 먹었냐는 물음에 친구는 몸이 좋지 않아, 점심을 먹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에게 진심을 담아
'지금까지 넌 정말 잘 살았다. 그러니 스스로를 칭찬해도 돼'라고 말해 주었다.
이에 친구는 피식 웃더니 '그럼, 적어도 오늘만큼은 스스로에게 점수를 줘야겠구먼.'이라고 했고,
나는 크게 동감을 표현했다.
친구와 통화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은 왠지 다리에 힘이 실리는 듯했고, 한층 가벼운 느낌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적어도 내 옆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그리고 전화 한 통을 주고받을 만할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마웠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었고, 힘을 빼고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와서 곧바로 지점에 있던 사원들과 가벼운 면담을 했고,
나는 아내와 친구로부터의 부력을 받으며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