슴슴한 맛
예전에는 맵고 짠 음식을 즐겼습니다만
이젠 간이 세게 된 음식을 먹고 나면 위와 장이 부대끼고 자주 과민반응이 나타나더군요.
자극적인 음식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워 되도록 멀리하게 되고 심심하게 간이 밴 음식이 오히려 입에 잘 맞더군요.
이런 취향의 변화는 비단 음식만은 아닌가 봅니다. 책이나 영화, 음악에 대한 기호마저도 확연히 달라져서 예전에 좋아했던 격정적이고 번뜩이면서 강렬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작품보다는 심심한 듯 은은하면서도, 서서히 스며드는 듯한, 하지만 뭉근하게 전해지는, 에너지의 총량은 상당한, 그런 작품들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살아보니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들은 반짝 타들어가다가 이내 사그라드는 경향을 보이지만 밋밋하고 슴슴하게 느껴지는 것들은 도드라지거나 돋보이지는 않지만 그 여운은 은은하게 지속되는 것 같더군요.
냉면 마니아들이 '평양냉면은 슴슴하여 별다른 맛은 없는 듯한데, 어느 날 뜬금없이 그 맛이 떠올라서 계속 찾게 된다’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죠.
젊음이란, 마구 피어나는 불꽃처럼 싱싱함과 화려함의 덩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별다르게 꾸미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쁘고 싱싱하기에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탐스러운 것이겠지요.
하지만 가수 이상은의 노랫말처럼 우리는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지금에 와 지난날을 돌아보니, 그 시절 우리의 본질은 이미 싱싱했으며 화려했음을 알게 되더군요.
젊은 날엔 그것의 정수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볼 때만이 그 시간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어렴풋이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하여 젊은 날엔 젊음을 몰랐듯, 어떤 것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당장엔 알 수 없다가 훗날 과거가 된 오늘을 돌아봐야만 비소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문장을 써놓고 보니, 조심스레 추측만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네요.
해가 거듭될수록 삶은 대체로 ‘모호’하다는 사실만이 더욱 확실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탓에 누군가 인생을 논하자면, 그냥 잘 모르겠다고 스스럼없이 인정해 버리고 마는 거죠. 그리고 생은 아무렇게나 그냥 제 입맛에 맞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냥저냥 나이 오십이 넘고 돌아보니
젊음의 특징은 뭔가 응축된 에너지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것이라 여겨지는데 그 분출 뒤에는 자연스레 공허함이 수반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돌아보니 젊음의 에너지는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않고, 마치 잠시동안 빛나던 꽃이 점점 시들어가며 쓸쓸하게 꽃잎을 떨구고 있는 모습과도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전부는 아닐 겁니다.
달고 맵고 짰던 자극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제 밋밋하고 슴슴하지만 그 나름의 맛을 지니고 있는 시간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40대 중반까지도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매번 크고 심각하게만 느껴졌습니다. 하여 그 앞에서 몹시도 파닥거렸던 것 같습니다. 젊음의 혈기가 그랬고 타고난 성정 또한 그러했습니다.
요즘은… 음… 내 앞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조금은 여유를 가지게 되더군요.
달고 짜고 매웠던 자극의 시간은 저만치 지나가고, 이제 슴슴하고 밋밋한 시간이 펼쳐져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나이가 든 탓이겠지요.
살아보니 어떤 일은 애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냥 내버려 둬도, 되는 것은 되는 경우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요사이 자주 이런 생각을 합니다.
되는 것은 되는 거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다. 그게 되는 거다. 뭐가 됐든 간에.
이런 숙명적인 태도가 이제는 싫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냥 조용히 지켜보려고 합니다.
세상은 나와는 상관없이 무심하게 돌아가고 있더군요.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방식은 아니더라도 말이죠.
그게 세상이 흘러가는 방식이겠거니 하고 생각해 버립니다.
한때는 노력하면, 나이가 들게 되면, 제법 현명한 사람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현명해지기보다는
생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세상 많은 것들은 어쩔 수 없음을,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는 걸,
어느 순간 송두리째 인정하고 있더군요.
이런 삶의 태도가 씁쓸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숙명론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어쩌면 현명한 자세가 아닐까 하고, 막연하지만 조심스럽게 짐작해 봅니다.
또 이런 태도가 심심하고 따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요즘 들어서 점점 슴슴하고 밋밋하고 싱거운 맛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재미나 의미가 따로 있는 건 아닐까요.
바람이 동백나무를 가볍게 쓸고 지나갑니다.
한낮에는 2월의 찬바람 속에서도 미세하게나마 온기가 묻어오는 걸 느낍니다.
겨울은 지나가고, 늘 그랬듯 따듯한 봄기운과 함께 하나 둘 꽃이 피겠지요. 때가 되면 말이죠.
이처럼 모든 것들은 결국 시간 속에서 변해가기 마련이지요.
슴슴하면서도 밋밋하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