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놀랍게도 하루사이 해가 바뀌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달력에는 12월 31일이 지나면 년(年) 표시가 바뀌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면서도, 매번 한결같이 일어나는, 같은 변화인 것처럼, 12월 31일과 1월 1일은 해만 바뀔 뿐이지 어제같은 오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이러한 사소한 변화에 호들갑을 떨며, 해마다 종각 주위로 구름떼 인파들이 둘러싸고, 서울시장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번갈아 가며 33번의 타종행사를 시작하고, TV화면에서는 가요대상, 연기대상, 연예대상, 올해의 10대 뉴스, 새해에 바뀌게 되는 제도의 변화들 소개하고, 카톡을 비롯한 각종 SNS에서는 지난해에 대한 수고로움과 새해를 맞이하는 것에 대한 서로의 희망기원 인사를 건내는 것을 당연한 수순이나 일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아 호들갑까지는 아니어도 적당한 포도주를 준비하고, 새해에 이루고 싶은 작은 소망을 적고 아내와 함께 공유하고 TV화면 속에 시선을 고정하다가 12시가 되기 직전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는 해가 바뀌는 그 순간을 애써 함께 하며, 주로 내쪽에서 일방적이긴 하지만 나름의 덕담을 주고 받는다. 내년에 이루고 싶은 것은 뭐냐? 서로에게 뭘 바라는가? 내년에도 가족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등의 세모(歲暮)에 걸맞는 듯한, 제법 건전한 듯 여겨지는, 소소한 이벤트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내일, 몹시 춥다는데, 꼭 가야겠어? 도현이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구?"
그러니까.. 바로 어제였지만 작년 마지막 날 저녁, 아내가 걱정스럽게 던진 말이다.
"괜찮아, 겨울은 원래 추운거야, 도현이도 이제 처음이 아니잖아."
"당신은 괜찮지만... 도현이는..."
무심한 듯하지만 단호한 내 대답에 아내는 말을 끝까지 이어나가지 못하고 눈만 끔벅거리며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5시 30분, 알람이 울리자 이내 눈을 떴고,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의 귓가에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6시 10분, 세수만 짧게 하고, 미리 꺼내둔 등산복을 챙겨 입고, 빵과 우유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후, 아이와 함께 살며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6시 20분, 손전등을 쥐고 찬 새벽공기와 어둠을 조심스럽게 열며 비음산을 천천히 오른다.
7시 20분, 아침이 열리기 시작하는 정상 도착하면 웅성웅성거리는 30-40명의 군락속으로 들어가 1월 1일 아침해가 떠오르기를 추위에 발을 구르며, 동쪽 하늘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불그스럼한 변화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7시 35분경, 마침내 2020년 첫번 째 해가 떠오르고 사람들은 아! 또는 와! 라는 탄식을 내뱉으며 연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댄다. 당연히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마께와 장갑낀 손에 땀이 적당히 흐를 정도가 되자 정상에 도착했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여러 무리의 사람들은 동쪽 하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땀이 식어 차가워진 몸을 살랑살랑 흔들어 대고 있었다. 밤이 물러가고 아침이 밝아오는, 어둑신하고도 푸르스름하게 밝기도한 아이러니한 시간, 정상에서의 이런 모습은 어떻게 보면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 속에 나오는 미어캣 무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작년 오늘, 나처럼 이곳에 왔던 국회위원이 귀마개를 벗으며 환한 얼굴로 악수를 청해 왔다. 도의원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내가 찍은 후보였고 드라마틱하게 역전으로 당선이 되어서 인지 몰라도, 친한 외삼촌을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괜실히 웃음이 났고, 올해도 그가 오려나 하고 내심 기다려선지 더욱 반가운 느낌이었다.
그러는 사이, 동쪽 하늘을 향해 무리를 이룬 삼사십명 가량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온다! 나온다!"
사람들은 일제히 휴대폰을 꺼내들고 일출 사진을 찍어 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희망이나 시작내지는 도약 혹은 긍정이 흠뻑 뭇어 나왔고, 간혹 결기 가득한 얼굴도 발견할 수 있었다. 5분 남짓한 사이에 보석처럼 작게 빛나는 첫날의 해는 완전히 차올라 자신의 원형 그대로를 알리고 있었다.
그러자,
한마음으로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던 사람들은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서둘러 산을 내려가기도 했고, 일행과 일출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거나, 일부는 뜨거운 커피나 차와 함께 일출의 감상을 나누어 마시기도 했다.
5년 전부터 비음산 해맞이를 하는 것이 해가 바뀌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소소한 이벤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데, 나 역시 호들갑이라면 호들갑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가 다를 리 없고.. 2019년의 아침과 2020년의 아침이 달력의 숫자만 바뀔뿐, 다를 바 없는데도 이런 새벽 이벤트를 행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해가 바뀌는 것에 대해 나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벤트를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삶에 대한 의미부여' 외에 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 있어, 어떤 이유나 의미를 붙이거나 찾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들 삶에 중간중간, 명확한 선을 확실히 긋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다면 즉, 삶의 의미나 중간의 명확한 선을 긋지 않는다면, 이내 모호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고, 그것은 불확실하고 혼란 속에 빠져 든다는 말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오스나 불확정적인 것을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대부분 모호하며, 혼돈이고, 불확정으로 가득 차있는데...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받아 들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우리 조상에게서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삶의 어디 쯤에다가 보이지는 않지만 나름 굵직한, 의미의 선을 긋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천문을 읽을 수 있는 시점부터는 좀더 확실하게 인생에서 이러한 선들을 긋기가 편리졌다는 것이다.
그 모호하고 불확정적이며 혼란스러운 느낌을 피하기 위해서 그은 선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새해가 열리는 1월 1일이며,
이 선의 획을 그으면서 사람들은 그들만의 삶의 의미를 또다시 새롭게 부여하면서, 온통 모호하며 불확실로 가득찬 그들의 미래에 불을 밝히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불이 바로 오늘 아침, 1월 1일, 한 해의 첫날에 떠오른, 보석처럼 빛나던 빨간 태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하루, 또 다른 선(線)하나가 자연스럽게 내려와 온세상 사람들 앞에게 놓이고, 이 2020년이라는 선(線)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릴 없이 모호하기만한 세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불 밝히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이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호들갑을 떠는 이유라면 이유인 것이고,
오늘 아들과 함께 산을 올라 해를 맞이한 이유인 것이다.
- 2020년, 이 글을 읽는 모두들 조금더 나은 기분으로 살아가길 기원하며
'사색 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그마와 슈퍼히어로 (0) | 2020.07.19 |
---|---|
20년 (0) | 2020.02.15 |
노래방 (0) | 2019.12.14 |
나는 누구인가? (부제 : 괜찮다) (0) | 2019.12.11 |
가을이 오면 (0) | 2019.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