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좋아한다는 건 외롭다는 겁니다.

새 울고 꽃이 피는 봄입니다.
꽃들은 서로 다투지 않고 조용히 제 차례를 기다립니다.

벚꽃이 폭죽처럼 피고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더니, 어느새 꽃은 지고 연둣빛 새순이 올라오더군요. 여린 잎사귀로 햇살이 투과되어 영롱한 것이 사랑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요. 어젯밤 산책길에 보니 그사이 나뭇잎들은 초록을 띤 채 훌쩍 커 있더군요.

언젠가 세월이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고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걸 두고 한 말입니다.
꽃이 있더니 꽃은 사라지고 연두색 새순이 나 있고, 작고 여린 잎사귀다 싶더니 이제는 제 모습을 갖춘 초록으로 변해있네요. 이런 나무의 변화를 보고 있으면 시시각각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 거죠.
"꽃 피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세월이로구나."  

식물은 한 자리에서 붙박여 정적인 것 같아도, 안으로는 조용하지만 부지런하게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자연에 순응하며 그 에너지의 흐름에 가만히 제 몸을 맡기고 있는 걸까요.

오십을 넘어서자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전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생명을 바라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소멸을 향해 하루하루 늙어가는 건 아쉽지만 이런 시선을 갖게 된 것은 좋습니다.
차분히 변해가는 나무를 보며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에 더 익숙해지자고 고개를 끄덕여봅니다.  

계절은 대체로 정직하더군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계절만큼 믿음이 가는 건 드물더라고요.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죠. 계절은.

아이였을 땐 여름을 좋아했고, 청년이 되어서는 가을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니 봄이 좋습니다. 따듯한 기온은 말할 것도 없고요. 피어나는 봄꽃도, 어리고 여린 연두색 잎들도 이쁘고 기특합니다.
상큼 발랄한 젊은 친구들의 옷차림도 봄이라는 계절과 잘 어우러져서 좋습니다. 아무튼 봄은 싱그러운 계절입니다.
어쩌면 늙어 갈수록 싱싱함과 순수함을 그리워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에는 봄꽃을 보면 그냥 '이쁘구나' 했는데, 요즘엔 시시각각 피어나는 꽃들이 신기하고 대견하기까지 합니다.
봄꽃 앞에 서있으면 아이를 바라보는 아빠의 마음이 되는 것 같군요.
이처럼 봄 풍광 같은 자연은 점점 순수로 와닿습니다만, 사람들에겐 되도록 속내를 내비치지 않게 되더군요.
나이가 들수록 낯선 것보다 익숙하고 오래된 것으로 자꾸만 마음이 기웁니다. 가뜩이나 줄어들고 있는 내 안의 에너지를 더 이상 불편하고 불확실한 것에 쏟기 싫은 마음이 아닐까요.
  
사람을 좋아하거나 잘 어울리는 성향은 아닙니다.(자라온 환경 탓일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타인을 싫어하거나 배척하는 건 아니지만, 남들을 향한 관심은 없는 편입니다. 한마디로 다정한 성격은 아니라는 거죠.
중년이 된 지금도 이런 성격의 근원은 변함없지만, 예전보다 조금은 너그러워진 것도 같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잘금잘금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드는 것은 달갑지 않지만, 성정이 누그러지는 것은 좋습니다. 여유와 넉넉함은 세월이 가져다주는 이점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어떤 대상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다분히 일방적이지 않을까요. 그것이 사람이든 꽃이든, 사물이든 산과 바다가 됐든, 대게는 나로부터 먼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한 대상을 향한 호감이 일방적으로 비롯됐다면, 이는 심리적 불평등을 수반하게 될 것 같군요.
꽃은 자신을 좋아해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도 우리는 그냥 꽃을 좋아합니다. 그리하여 꽃을 향한 불편과 불평등의 상황을 즐깁니다. 봄꽃을 보려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먼 거리를 기꺼이 나서는 거죠.
좋아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고 오히려 이런 상황을 즐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불평등, 불편함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순수하게 한 대상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순수하게 좋아한다는 건, 가수 윤종신의 노랫말처럼 '우리 슬픈 계산이 없었던 시절'인 거죠. 

좋아하는 마음이 일방적일 수 있듯, 좋아하지 않는 마음도 마찬가지겠죠. 호불호의 감정엔 잘잘못이 없을 겁니다.
그냥 좋았고, 싫었던 거죠. 한때 좋아했던 대상이 어떠한 이유로, 이젠 그렇지 않기도 하는 거고요.
그냥 호불호의 시절이 있었건 겁니다.
그땐 그랬었고, 지금은 아닌 거죠. 물론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좋을 수도 있고요.

세상의 전부를 좋아할 수도 없지만, 어떤 것을 굳이 좋아할 필요도 없습니다. 좋아하는 대상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대상이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죠.
주변 대상이 날 좋아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려 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다르니까요.
봄꽃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냥 내가 좋으니까, 그걸로 된 거죠.

계절을 굽이굽이 돌고 보니 호불호의 감정이 변해가듯 '옳고 그르다'의 가치판단도 이젠 '나와 다르다'라는 관점으로 바뀌더군요.
‘다르다'의 관점에는 타인을 향한 인정과 이해도 있겠지만, 더 큰 바탕은 시비를 다투기보다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 버리고, 내 안의 부족한 에너지를 아끼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 제법 나이가 든 거죠.
피곤하게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냥 '다르다'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 편하다는 걸 알게 된 거고요.

아이러니하게도 호불호나 시비의 상황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저는 비가 오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냥 어둑하고 축축한 느낌이 싫습니다. 하지만 비가 그치고, 날이 갠 뒤의 풍경은 좋아합니다. 깨끗하게 씻긴 채 제 빛을 드러내고 있는 거리가 좋고, 윤기가 감도는 나뭇잎이 좋습니다. 한껏 청량해진 공기도 좋고요.
비가 오지 않았다면 비 그친 뒤의 풍경은 볼 수 없는 거니까, 호와 불호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요. 이처럼 좋은 것이 싫은 것 뒤에 따라오는 경우와 전에는 맞다고 생각했던 일이 지금은 아닌 경우가 더러 있더군요.

생은 본질적으로 외로움을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이 죽음을 향하고 있다면, 궁극엔 혼자고 결국 근원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외로움에 익숙해져야 하고, 적절히 즐길 줄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 삶의 지혜는 외로움을 잘 알고 견디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따금 깊은 외로움이 엄습해 와 감당하기 힘들 때면 곁에 있을 누군가 필요한 거겠죠.

좋아한다는 것은 어둡고 쓸쓸한 외로움 속에서 따듯한 사랑이 몹시 그리워질 때, 곁에 있을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아한다는 건, 혼자고 외롭기 때문일 겁니다. 외로우니까,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좁고 긴 터널 같은 외로움을 함께라면 견딜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뭔가를 좋아하고 있다면 당신은 외롭다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면, 그건 그 존재가 외롭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죠.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외로움과 외로움이 만나서 서로가 다르며, 또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있는 겁니다.
산다는 건 외로운 것이고, 좋아한다는 것이고, 깊은 외로움을 나누며 사랑으로 익어가는 거겠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슬렁슬렁 봄밤을 걸었습니다.
문득 밤하늘을 보니 깎여나간 손톱같이 희고 가녀린 초승달이 걸려있고요. 그 아래로 더 하얀 이팝나무꽃이 팝콘처럼 화들짝 피어있고요. 산비탈로부터 달콤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달려드네요.
바야흐로 세월은 5월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