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그러한 것은 분명, 아니겠지만..
세상사 많은 일들을 돌아 볼 때.. 고통 뒤에는 快가 수반되는 듯하다.
운동이 건, 공부 건, 사랑이 건, 뭔 일을 하든지 간에 어느정도의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인 것이다.
한마디로 뭔 일을 도모하건 괴롭다는 이야기일텐데...
운동을 하다보면 몸의 고통스러움을 알게 될 것이고...
공부를 하면서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고통이나.. 좀이 팍팍 쑤씨는 경험들을 하게 될 것이다.
이는 좋다는.. 사랑도 마찬가지어서 사랑을 하게 되는 순간부터 행복한 고통이 뒤 따른다.
보고 싶어 미치겠어... 고백을 하고 싶어 미치겠는데... 용기나 나지 않는다는 등의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다. 누구나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기분을 분명히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런 대부분의 일들이 고통만을 수반하는 것이라면, 아마 공부나 운동을 사랑을 하려는 이는 이 세상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수련하며 고통을 견뎌나가는 것은 고통 뒤에 수반되는 짜릿한 快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을 하면 숨을 헐덕거리며 심장이 터져 나가는 느낌에 마치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지만
운동에서 느끼는 것이 고통만 머무르는 것은 분명 아니라는 말이다.
고통 속에서, 혹은 고통 뒤에 따라오는 快가 훨씬 더 가치있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고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좀이 쑤씨는 공부 뒤에 따라오는 快가 없다면 뭣하러 그렇게 사람들은 공부를 하는 것일까?
설익은 사랑에 괴로움에 눈물과 가슴을 쥐어 짜면서도 시간이 흐른 후, 사람들은 또다른 사랑이나 아니면 같은 대상에게서 전보다 더 깊어진 사랑? 혹은 情을 시작하는 것은 고통을 뛰어 넘어선 快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고통을 넘어 서지 못한다면 快를 맛보지 못하고...
고통에 고통이 더해져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통을 뛰어 넘어야 할까?
그에 대한 답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삶을 사랑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 이닐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아이구... 여기까지 기껏 쓰고보니 내가 감당하지 못할 주제를 잡았다.
아직 익지 않았으니 다시 묻어 두자..
애써 잡히지 않는, 정의내릴 수없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고통을 받지 말지어다...
고통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도 극복의 또다른 방법이라는 것도 이제는 슬슬 감잡아 가야 할 세월..
감당할 수 없다면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꼭 고통이 극복해야 할 대상은 아니지 않는가?
억지로 몸과 마음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추측이 명백한 사실이나 확신으로 익을 때 까지...
잠시 멀찍이 물리치고 피해서 기다리자...
감나무에 매달린 감이 익어 떨어질때 까지..
'사색 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연의 묘미 (0) | 2008.05.22 |
---|---|
그 많던 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0) | 2008.05.15 |
5월의 꽃 (0) | 2008.05.09 |
남에게만 하는 줄 알았지? (0) | 2008.05.08 |
살아 있다고 느낄 때 (0) | 2008.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