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희곤
주연: 조승우, 양동근, 최정원, 마동석, 조진웅
최동원은 직구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동원 선수!
그러기에 그가 그립다.
그러기에 이 영화 퍼펙트 게임을 보며 눈물을 흘린 것이리라.
최동원의 생은 드라라마틱하다.
고교시절부터 스타였고, 병역문제만 아니었으면 국내 처음으로 메이져리그 진출을 했고,
최동원이라는 이름 석자의 무게는 그가 국가 대표로 였을 때부터 대단했었다.
그리고 선수로써 롯데를 84년도 우승까지 이끌어냈고.. 그리고 88년도 선수협결성으로 트레이드..
그리고 은퇴후 사업 실패, 해설, 2군 감독... 그리고 경남고와 부산고의 OB대항전에서의 그 모습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화 퍼펙트 게임을 보는 내 마음은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이 오버랩되면서.. 감정이 이입되어
눈물이 났던 것이리라.
영화 퍼펙트 게임은 영화 국가대표와 맥락이 비슷한 영화이다.
두 영화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스포츠 영화이고, 감동을 주는 포인트도 비슷하다.
꼼꼼히 따져보자면 작위적인 감동이입이 있겠지만.. 국가대표가 그랬던 것처럼
가볍게 볼수 있는 영화이기에 무리는 따르지 않는다.
또한 실존 인물들이 벌였던 사실을 테마로 했다는 것또한 이런 작위적인 부분이 주는 거부감을 쓸어버리기에 충분한 것이다. 허구보다 사실을 바탕으로한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장점중에 하나가 바로 관객은 사실이기에 사건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보다는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예전에 시골의사 박경철님의 최동원선수의 직격인터뷰를 본적이 있다.
그때 최동원 선수의 인생이 어쩌면 직구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커브나 슬라이더가 아닌 직구같은 인생을 살고 계시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인터뷰를 보며 비로소 최동원이라는 인물에 대해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그 전까지 내게 있어 최동원은 그저 이름 석자만 유명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말년이 퇴색되어 버린 이유 또한 직구를 던지며 살았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직구같은 인생이 내게 있어는 알수없는 어떤 끌림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직구였기에 더 드라마틱했던 그의 인생이다.
직구였기에 영화화되어진 그의 삶의 일부 "퍼펙트 게임"
이 영화 퍼펙트 게임은 최동원과 선동렬의 87년 1:1 대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조승우 양동근의 무난한 연기보다는 오히려 조연 조진웅의 캐릭터가 더 빛을 발한다.
조진웅의 부산사투리는 역시 부산출신이라 아주 자연스러웠다.
영화를 보고 난후 최동원선수의 인터뷰를 찾아 읽어보며 다시 한번 직구같은 삶에 매력을 느꼈다.
다만 최동원과 선동렬의 대결구도에 너무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언제가 최동원 선수의 전기영화를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동원 선수의 어린 시절과 말년까지의 진지한 전기영화 말이다.
아래는 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중 일부를 발췌했다. 꼭 한번 읽어 보시길...
1. 국보급 투수 최동원,,
지난 6월 24일 김해시 상동 롯데 부산구장에서는 한화 이글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2군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최동원 한화 이글스 2군감독은 그곳에서 바로 자신이 몸담았던 롯데를 상대로 2군 경기를 지휘하고 있었다. 편견이었을까. 그를 만난 첫 인상은 ‘많이 약해졌다’ 혹은 ‘순치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그를 만나 우선 파란만장했던 야구인생에 대해 물어 보았다.
- 고교시절 4 연속 완투 우승, 17이닝 노히트 노런, 연세대학교 23연승, 대륙간컵 야구대회 MVP. 84년 정규시즌 27승, 한국시리즈 5회 연속 등판 우승 등 선수시절 전무후무한 기록들을 세웠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선수생명에는 거의 자해행위에 가까운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무리한 피칭을 했나요? 승부욕 때문이었나요?
“일정 부분 그런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야구는 팀 운동입니다.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사람은 다 해야 했죠. 팀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데, ‘내가 힘들어서..’라고 빠진다는 게 통할 수 없었어요. 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만 해도 전력상 6차전까지 3:3으로 간 것만으로도 우리 팀으로서는 능력 이상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욕심을 안낼 수 있겠습니까? 당시 강병철 감독님이 농반진반으로 ‘네가 1,3,5,7 차전을 맡아라’ 라고 하셨는데, 실제로는 5게임이나 나서게 되었죠. 내가 나서서 가능하다면 했어야죠. 고교시절부터 프로시절까지 늘 그런 상황의 연속이었죠.”
- 프로 시절은 대가가 주어지는 일이니 그렇다 치고, 아마시절의 혹사 때문에 너무 빨리 지고 말았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스스로도 프로진출 때 이미 전성기를 지난 상태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긴 침묵 끝에 일을 열었다) “맞는 말이지만, 이제는 아쉬운 것도 원망도 없어요. 단지 흘러간 과거일 뿐 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시대적으로 볼 때 하지 않으면 안됐죠. 원래 지도자는 성적 지상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면 자리보전이 안되거든요. 그 시대에는 또 그 시대의 논리가 있는 것이죠. 저는 그 시대의 선수였고요, 이제는 흘러간 과거고 원망도 후회도 없습니다. 누구나 인생에 후회는 있겠지만 빨리 털어야죠. 그래야 앞으로 가죠. 아니면 옆으로 가잖아요. 오늘을 소화해야 내일이 있을 뿐입니다.”
- 선동열과의 세기의 대결은 결국 1 승 1 무 1패로 끝나고 말았죠. 후배 선동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좋은 선수죠. 나는 타자가 아니라 타석에 서본 일이 없으니 선동열의 볼이 홈 플레이트를 파고들 때 타자들이 느끼는 감정을 알지는 못하죠. 때로는 내 공도 어땠을까 궁금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제대로 된 슬라이더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타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볼이 무거워서 공략이 쉽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 선수시절 팀과 불화가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선수협 사건이 결정적 이었을 것 같아요. 롯데 시절에 어느 날 70대 할아버지가 손자를 데리고 와서 사인을 해달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당신도 선수였다고 하시더군요. 그때 할아버지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면서 우리 선수들도 노후를 준비 할 수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만해도 당장 밥 값도 안 되는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많았어요. 그 선수들도 프로의 뿌리를 내리는데 공헌한 사람들 아닙니까. 더구나 야구란 혼자 하는 게 아니죠. 당시에 내가 잘 나가던 것도 결국은 다른 선수들의 공이라 싶더군요. 그래서 선수협을 만드는데 앞장 섰어요.”
2 타고난 반골기질
- 그래도 혹시 본인이 가진 반골기질이 작동하거나 팀에 대한 불만이 작용한 탓은 없을까요?
“반골기질… 제게 그런 게 있죠. 구단에 대한 불만, 그것도 있었겠죠.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동료의식이었어요. 잘나가는 선수가 주도하지 않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지금도 그것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 한미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로 나서서 맞았던 코스에 다시 같은 공을 던진다든지. 아니면 일부러 한가운데 직구로 승부해서 홈런을 맞는다든지 하는 고집도 일면 그런 점과 상통하지 않나요?
“그런 건 객기로 보였을 테죠. 실제 그런 비난도 들었어요. 하지만 그건 객기가 아닌 준비된 마음가짐입니다. ‘나는 이길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정면 승부를 하게 만들었죠, (그는 이 부분에서 답답하다는 듯 여러 번 가슴을 두드렸다). 이해가 안되세요? 나는 늘 최선을 다해서 연습하고 몸을 만들었어요. 그런 큰 경기는 나를 평가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왜 비겁하게 그걸 피해갑니까? 저는 지금 선수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 그런데 늘 듣던 ‘최동원은 반골기질이 강하다’라는 평 말입니다. 당시 최고의 선수였는데 굳이 왜 그랬을까요?
“원래 있었던 것 같아요. 천성이죠. 나는 아니다 싶으면 항상 그렇게 해요. 지금은 다들 부정적이지만 언젠가는 내 진심을 알아 주겠지, 나중에 이해하겠지, 이런 생각이었어요, 그걸 애써 감추지 않았던 거죠.”
- 일부 폄훼하는 사람들은 튀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다고들 하는데요?
“그런 사람들, 자기가 같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요?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말아야, 자기도 그런 평가를 안 받는 겁니다. 내가 당하지 않으려면 남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해요. 저는 내내 말에 시달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이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가슴에 맺힌 것들이 커 보였다.)
3 놓쳐버린 기회들
- 81 년 캐나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계약이 무산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었는데요. 일부에서는 연봉에 지나친 욕심을 부렸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연봉이요? 그런 소리들을 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사실은 아니었어요. 연봉은 61만 달러에 계약이 되었었죠. 하지만 병역 문제가 걸렸어요. 당신 차범근 선수가 공군에서 병역을 마치고 독일로 갔죠. 그러니 저도 마찬가지로 병역 문제가 걸림돌이 된 거죠. 81년도에 캐나다 수상이 왔을 때, 전두환 대통령이 교민들의 사기를 위해 전향적으로 검토하라는 지시를 했다더군요. 그때 청와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죠. 하지만 결국 병역문제가 걸림돌이 되더군요.”
- 그럼 아마시절 일본 롯데 가네다 감독의 양자로 입적해서 일본 프로로 진출하려던 문제도 역시 같은 이유였나요? 그때는 귀화 아니냐는 식으로 여론이 안 좋았었는데요.
“그때는 아니었어요. 당시 일본에는 외국인 선수 제한이 있었고, 롯데에는 외국인 티오가 꽉 차 있었어요. 그래서 가네다 감독의 양자로 입적하자는 제안이 오간 거죠. 하지만 조부의 반대로 무산되었어요. 완강하셨죠. 아무리 서류상이지만 일본 사람의 양자로 입적하는 게 말이 되냐고요. 저는 그때 고3 이었는데 아무것도 몰랐어요. 욕심도 없었고요. 어른들 사이에서만 이야기가 오간 거죠.”
- 다시 프로 시절로 돌아가보죠. 연봉문제로 구단과 매년 충돌했었죠. 어차피 연봉은 국내 최고였는데, 몸값에 대해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집착할 이유가 있었나요?
“그건 구단의 언론 플레이가 많이 작용 한 겁니다. 스타 선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선수는 개인입니다. 구단은 힘이 있고요. 특히 그 시절은 말할 것도 없죠. 아무리 스타 선수라도 구단을 이길 수는 없어요. 그 점은 언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구단 이야기를 듣겠어요? 선수 편을 들겠어요? 프로선수가 구단과 몸값을 협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구단에서 처음에는 저하고 협상을 하다가, 나중에 아버지가 오셔서 조율해달라고 부탁을 하고서는 나중에는 아버지가 개입해서 협상이 깨졌다고 흘리는 거죠. 그럼 언론은 그렇게 써요.”
- 대부분 선수들은 나중을 생각해서 구단 프론트에 눈도장을 찍으려고 하잖습니까? 나중에 지도자의 길을 걸을 때를 대비해서요. 그런데 최 감독은 어땠습니까?
“안 했습니다. 왜 그래야 하죠? 그때그때 무리가 되어도 그냥 선수로서 최선을 다했어요. 내게 충실했죠. 나는 게을리 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경기에 나가라면 나가고 던지라면 던졌습니다. 어깨나 몸을 생각했다면 그럴 수 없었죠. 그냥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선수로서 할 일은 그것뿐 입니다. 나중 일은 그때 또 최선을 다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물론 결과적으로는… 어쨌건… 지금은 행복해요. 그럼 됐잖아요.”
(그는 당시 롯데구단에 대해 여전히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제 최동원도 과거의 최동원이 아니었다. 지난날 시속 150km의 광속구처럼 쏟아내던 직설적인 말들이 아제는 완곡한 표현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후략----
[출처] 야구선수 최동원 인터뷰 원본 |작성자 시골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