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은 미봉책
힐링은 퉁치는 개념이에요. 진단을 해야 하는데 정확하게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미봉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외과의사가 수술하다가 ‘아, 이건 지금 자르면 안 되겠다, 복잡하다.’ 해서 다시 덮는 경우가 있어요. 힐링은 그런 것 같아요. 메스를 들이 대려면 정확하게 진단해서 뭘 잘라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힐링은 진단도 하지 않고 수술도 안 받겠다라는 얘기거든요. 대충 한 번 가보겠다 라는 얘긴데, 비겁한 담론이죠. 힐링의 수사학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네 마음만 바꾸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뭐가 달라 보여요? 착각이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나서 내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겠다는 이런 절차들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자꾸 힐링을 하게 되게 되면 힘 있는 사람이나 권력자들은 좋아할 거예요. 노예가 피라미드 쌓다가 힘드니까 돌 옆에 앉아서 “이 일이 내 무덤은 아니지만 가치 있는 일이야. 유네스코에 등재될 건물을 올리는 것이야.” 이러고 있어요. 그게 힐링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힐링이죠? 힐링일 수 없어요. 문제를 외면하고 도피하는 거죠. 사람들이 힐링에 빠져드는 것은 편하기 때문이에요. 힐링이 가지고 있는 담론들은 무기력함, 약간의 집중력 없는 상태, 맹한 상태를 유지하죠. 뭐든지 문제가 있으면 냉정하게 진단하고 문제가 어디서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고, 해결을 해야죠. 용기가 있으면 고칠 것이고 용기가 없으면 방치하는 거예요. “당신 상황이 이렇다. 해결책은 이거다. 책임은 당신이 진다.” 이렇게 사람들을 떠 안아야 되는데, 힐링은 “괜찮아요” 하고 넘어가요. 저는 상담하려는 분에게 본인의 위치를 파악하게 하고 “여기가 뛰어내리는 곳이다. 여기서 뛰어 내려라.”고 말해요. 그런데 못 뛰고 뒤로 물러나면 “너 물러났다. 너 비겁한 걸 알아라.” 고 말해요. 오히려 자신이 비겁한 걸 알고 살아가면 괜찮아요. 왜냐하면 계속 비겁하게 살면 자신한테 화가 나서 언젠가는 용기를 내요. 그런데 힐링은 ‘여기서 뛰면 뭐해? 어차피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지각 변동으로 지층이 올라 올 텐데’ 하는 식이죠. 힘이 없게 만들고, 결단을 어디서 해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게 만들죠. 그런 것이 편하니까 비겁을 은폐하기도 좋죠. 직접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데 개입할 필요도 없고요. 힐링은 우리가 19세기 이후에 인문학적으로 성취한 것에 비해서 너무 낙후된 개념이죠. 그런데도 그게 먹히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비겁해졌다는 거고, 무기력해졌다는 거를 반영하는 거 같아서 씁쓸하죠.
힐링 중에 또 하나의 메커니즘이 누구를 용서하는 담론이에요. 그런데 용서는 강한 자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약한 자가 용서를 하면 포기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 약한 자들이 용서해요. 용서나 화해는 굉장히 강해졌을 때,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거에요. 지금은 약자들이 힐링을 해요. 위험하죠. 많이 위험한 담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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