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에 관한 명상>
한 해가 바뀌고 보니 느닷없이 쉰이라는 나이가 되어버린 겁니다.
쉰이라는 나이를 어젠가는 마주하게 될 거란 생각은 했었죠. 당연한 소리지만 그렇다고 쉰이 어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서 빨리 쉰이 되고 싶다라든가, 이야! 드디어 내일이면 내 나이 쉰이다, 신난다! 라는 따위의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저 쉰이라는 나이에 대해 애써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모른 체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렇지만 이제는 누군가 내 나이를 물어오면 어쩔 수 없이 '쉰'이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써놓고 보니 쉰이라는 발음과 그 느낌이 어감상 나이가 두둑하게 들어간, 좀 고리타분하고 묵직한 느낌이 드는군요. 그래서 이제부터 쉰이라는 표현 대신 오십으로 고쳐 써보기로 하죠.)
뭐... 미국식으로 저는 올해 48년 4개월 하고도 12일이 되었습니다. 라거나, 그저 만 나이로 48세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대한민국, 그러니 한국식으로 오십이라고 답변을 하는 것이 보다 정당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며칠 전, 처음 만난 사람이 정말 내 나이를 물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법 태연한 척, 덤덤하게 오십이라고 대답을 했지만 막상 마음속으로는 조금 어색하고 찝찝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나이 오십이라... 반백년, 지천명(知天命), 앞으로 십 년만 더 지나면 예순, 이제는 제법 많은 나이.
생각해보면 기껏해야 앞자리 숫자가 4에서 5로 바뀌는 것뿐인데, 작년보다 고작 한 살 더 먹은 것뿐인데, 그 별것 아닌 것 같은 작은 변화가 주는 무게감은 상당한 듯 보이네요. 그리하여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설을 앞두고 나이 오십에 대한 생각들을 적어 보려 합니다.
적지 않은, 아니 이제 제법 많은 나이,
오십.
설 연휴가 시작된 새벽, 오십이라는 나이를 가만히 새겨봅니다.
'건강하게 백세까지'를 삶의 하나의 목표로 삼고 있는 저로써는 오십이라는 숫자는 반백년이면서, 삶아 온 날과 살아가야 할 날이 꼭 절반이 되는 시점으로 하프타임, 혹은 중간평가의 의미를 지닌 나이로도 여겨집니다.
그리고 영어 표현인 fifty-fifty(50:50)처럼 남은 50년 동안(꼭 건강하게 100세까지 살아보려구요.^^) 내 꿈이나 목표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아직은 적어도 50%는 남아 있는 나이라고 믿어보려 합니다.
하지만 당장 내 앞에 떨어진 현실은 이렇습니다.
그간 나를 지탱하고 있던 단단한 기억들은 뭉텅뭉텅 사라지고, 몇 해 전부터 M자형 탈모가 조금씩 시작된 좁던 이마는 이제 꽤 넓어졌고(우습지만, 저는 원래 좁은 이마여서 관상학으로 보아 속이 좁아 보였지만 이젠 탈모로 꽤나 넓어진 이마 덕분에 이해심과 재물운이 제법 있는 사람이 된 듯합니다.^^), 그렇게 야금야금 진행된 탈모로 인해 머리숱은 성기고 머리카락은 가늘고 힘없이 자라고 있습니다.(다행히 아직 흰머리는 그렇게 많지 않아 새치라고 부를 정도인 것에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이뿐이겠습니까. 몇 년 전부터 찾아온 노안은 가까운 사물이 흐릿하게 보여 여간 성가신 게 아닙니다. 건강검진 결과를 보니 청력은 차츰 떨어지고 있고, 피부는 이제 재생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졌는지, 한번 상처가 나서 아무는데 시간이 한참 걸리고 더군다나 흉터가 한번 생기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또 이 산 저 산 거칠게 오르내리던 무릎은 경미하게 시큰거려와 연골이 닳진 않았을까, 괜히 걱정이 됩니다. 그리고... 쉿! 잠시 소리를 낮춰 말하겠습니다. 사실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그간 화산처럼 끓어 넘치던 성욕 역시 감퇴하고 있다는 걸, 오십 언저리가 되니 확연히 느끼게 되더군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이겁니다.
오십 년이라는 세월은 욕구나 욕망들을 슬그머니 내려놓아야 할 그런 나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이치를 아는 지천명이라는 나이 오십은 어쩌면 세상보다는 스스로를 잘 알고 받아들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오십이라는 나이는 세월과 세상에 저항하기보다는, 세상을 잘 알고, 스스로를 고스란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더 이상 만용을 부리지 않아야 하는 그런 나이가 아닐까 합니다.
이제는 오십 대라고 말하려니 사십 대와는 사뭇 다르게, 확실히 그 무게감이 상당하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그리하여 세상과 타인 혹은 그 밖의 많은 것들에 대해 덥석덥석 함부로 대해서는 안될 것만 같고, 또 스스로도 세상과 타인으로부터 함부로 취급되지도 않아야 하는 그런 나이일 거라고 짐작해 봅니다. 이제부터는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 좀 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조심조심 나아가자고 다짐해봅니다. 그렇다고 마치 도마뱀처럼 눈알을 굴리며 남들 시선에 눈치 보며 살아가서는 더더욱 낡고 초라해지기 쉬운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름 생각을 해보면, 조금씩 조심스럽게 앞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겠지만, 내 앞으로 끓임 없이 밀려오는 세파를 향해서, 제법 당당한 태도로 맞서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는 막연한 생각입니다만, 왠지 모르게 이 나이쯤 된다면 아마도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하지만 세월이 상당히 묵은 나이 오십, 어쩌면 우리 앞에 떨어진 현실에서, 위도 아래로도 자유롭지 못한 나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직장인이라면 어쩌면 공감이 더 잘 될까요. 이 나이가 되고도 팀장이나 부장 혹은 이사로 올라서지 못했다면 아마 직장에서 차장이나 과장 정도의 직급일 겁니다. 이 직급을 달고서 나이 오십이라면, 정말 위로도 아래로도 뭔가 어정쩡하게 끼어서 왠지 자유롭지 못한 채, 마치 새하얀 빙판 위의 펭귄처럼 혼잡한 무리들 속에서 뒤뚱거리며 앞을 향해 황망하게 내달리고 있는 그런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렇게 한 참을 뒤뚱거리며 걷다가, 후다닥 자신을 앞지르고 이제 점점 멀어져 가는 무리들을 넋 놓고 보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스스로를 반추하면서 지나온 삶에 후회하기도 하지요. 그러다가 결국은 세월마저도 자신을 아무렇게나 밀쳐 버리고 지나가는 것을 그저 맥없이 바라보기도 하는 나이인 것 같습니다. 결국 지난날, '삶의 의미'라고 여기며 부여잡고 있던 대부분의 것들을 슬그머니 내려놓고는, 오직 가족이나 건강 정도의 키워드만이 남은 삶의 진정한 의미라고 여기며, 애써 건강과 가족을 부여잡으려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 오십, 이제는 냉정한 경쟁에서 멀찌감치 뒤처진 걸 스스로 깨닫게 되고, 또 뭔가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하면서 더 이상 세상과 타인 혹은 스스로부터의 경쟁을 슬며시 내려놓게 되는 나이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 자신을 비추어 보면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하여 이렇게 써봅니다.
이제 절박함으로부터 멀어진 나이
오십.
예전에는 나이가 들면 점점 아는 것이 많아지고, 경험이 많아져서
스스로의 인생과 세상이나 타인에 대해 뭔가 또렷하게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인생에서 확실하거나 확정적인 것들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히려 오십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결국, 몸도 마음도, 그 세월만큼 고스란히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사실과
인생에서 확실한 건 별로 없다는 것에 대한 확신과 내 앞에 놓인 삶 또한 모호하다는 사실만이 더욱더 선명해 보이는 겁니다.
기껏해야 인생의 숱한 모호함 속에서 대략의 방향성 정도는 겨우 가늠하면서 오늘 내일을 꾸역꾸역 밀고 나아가고 있다고만 짐작할 따름이지요. 그나마 이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말이죠.
돌아보면 참 우습기도 합니다. 예전엔 이런 근시의 시야 같은 이런 모호함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날들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십이 된 지금, 이런 삶의 불확정성과 모호함에 대해 숙명처럼 여기고, 나아가 오히려 이를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군요.
불확정적이며 모호함이 재미있게 다가온다고 이야기하면 조금은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저는 뻔한 영화나 소설의 결말을 보기 위해 돈이나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소 예측 불가하고 궁금함과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쉽게 읽히는 것보다 약간의 노력을 기울여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그러니까 좀 더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다들 그렇겠지만 너무 뻔한 결말은 재미없지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삶의 불확정성과 모호함에 대해 이제는 제법 흥미롭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또 모호함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말해보자면 '어제의 동지가 내일의 적',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이제는 정말 어제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정말 믿는 도끼에 발등 아니, 어쩌면 뒤통수를 찍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일 겁니다. 이는 세상을 의심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인생에서 벌어지는 각종 이벤트에 대해 조금은 떨어져 가만히 지켜보며 마음을 열어 두겠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삶에 대해 숙명적이거나 불확정성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삶의 태도나 가치관마저도 숙명이나 모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자면 제가 탄 배는 좁은 항구를 서서히 벗어나 언젠가 넓은 대양에 다다르게 되고 넓고 거친 바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비가 오는 날도, 천둥번개가 치고 풍랑이 크게 일어나는 날도, 심지어 태풍에 휩쓸리는 날도 있는 것처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죠. 불확실과 모호함이 계속되는 나날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멍하니 손 놓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 힘들지만 비바람이 치는 폭풍 속에서도 배가 좌초되지 않도록 앞을 살피고 노를 저어 나아가야만 할 겁니다.
결국 불확실한 것으로 가득한 삶의 파도를 넘어 큰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우리는, 삶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되 확고한 가치관과 태도로 일관해야 한다고 생각해봅니다.
오십을 맞이한 지금,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삶의 태도나 가치관은 확고하지만 더 이상 고집하지 않는다.
이제 오십이 되어, 스스로의 앞날을 짐작해 보건대
지금에 비해 인생이 크게 달라지는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고 이를 확신하지도 않습니다.
드물긴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좋은 쪽이던, 나쁜 쪽이던, 아주 가끔씩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니까요.
타인을 보는 태도 또한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낙관이나 비관의 가치판단의 시선이 아닌, 그저 내 주변에 존재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하나의 대상 정도로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세상을 향한 태도나 방향은 살짝 낙관에 기대어 두고는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것에 마냥 의지하지도 않는 그런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스스로에게도 다를 것이 없어서, 나 자신도 크게 중요한 대상이 아닌, 어쩌다 자연 속에서 그저 존재하게 되었다가 결국엔 소멸하고 마는, 별 것 아닌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아주 하찮은 존재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주나 자연 속에서 별것 아닌(특별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고 해서 아주 하찮다(아무런 가치 없는)는 말은 아니니까요.
지천명이나 반백살이 주는 어감이 가볍지 않은 것처럼 저는 '인간'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안쪽의 깊숙한 무게감이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삶에 대한 이런 제 자신의 태도가 아마도, 어쩌면, 세상과 타인과 스스로에 대한 약간의 애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고 짐작해봅니다.
세상과 그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존재하다가 결국은 소멸하고 마는,
어떤 의미에서 약간은 측은해 보이기도 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결국 후회도, 미련도 많지 않은, 그렇다고 뿌듯한 업적이나 행적 또한 많지 않은, 그런 인생이었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려봅니다.
시간의 쳇바퀴는 하루 이틀을 넘어, 일주일과 한 달을 아무렇지 않게 넘고, 훌쩍 일이 년을 지나고 문득 돌아보면 엉겁결에 삼 년이 지나있습니다. 매일매일 쫓기듯 반복되던 일상은 이제 무뎌진 채, 그저 같은 듯, 또 다른 하루를 묵묵하게 견디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지난 반생(半生)은 나쁘지 않았다 생각합니다. 그걸로 그럭저럭 만족한 삶이 었다고 생각해봅니다.
지금까지
오십이 되고서, 마치 생의 집착이라도 완전히 내려놓은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실상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생업을 향해 여전히 맹렬하게 거침없이 달려 나가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예전보다 에너지와 열정은 떨어진 것은 분명합니다만.)
뭔가 깨달은 냥, 제법 거창하게 떠들어 댔지만, 생각해보면 스스로 쑥스러워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 위에 써놓은 생각처럼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은 아닌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남은 생은 모호하고, 불확정적이며, 알 수 없는 것이니까요.
다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나이 오십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그렇게 모호함 속으로 빙그르 끌려가는 나이 오십에는 말이죠.
지천명이 되어 깨닫는 바가 고작 이 정도지만
그나마 좀 긍정적으로 변화된 것이 있어 하나만 더 말씀드리고 글을 마치려 합니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생에 있어 깊은 감사를 느끼게 되는 대상들이 선명해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진(眞)한 감사를 표현하게 되더군요. 부모님이 그렇고, 장인 장모님이, 아내와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또 만만한 벗들이 참 고맙고, 나를 있게 하신 조상님들이 고마우며, 일상을 살게 하는 회사와 대한민국이 진심으로 감사하더군요. 참 다행한 일이죠.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감사라는 감정은 그 대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많을 때 자연스레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돌아보면, 세상으로부터 지금껏 받은 것이 많은 것 같으니, 참 감사한 일이고, 생각해보면 이는 꽤나 복 있는 인생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언젠가 행복에 관한 책을 읽다가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던 적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복이라는 것도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을 짓거나 느끼는 거라는 생각입니다.
아무쪼록 새해는 복 많이 짓고, 복 많이 느끼는 나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어쭙잖은 시로 생의 하프타임을 시작합니다.
<오십> 난척선생
지난 내 마음처럼 쌀쌀맞던
1월 초순의 어느 아침
마침내 한 시절이 지고
또 한 시절 시작된다.
부디
흰 눈처럼 푸근하길
내 나이 오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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