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박 9일, 캐나다 로키산맥 트레킹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밴쿠버에서 환승 대기시간이 3시간가량 남아 있어 공항라운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화이트 와인 한 잔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팍팍했던 지난 여정을 떠올려본다.
여행이란 떠나는 것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를 띠고 있다. 이걸 생각해 보면, 다행이면서 감사한 일이다.
딱히 찾아 나설 곳도,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다면 그것은 방랑이라 불러야 할 것이고, 생각만으로도 아찔하고 황망해지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다시금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해 본다.
여행은 익숙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는 가슴 설레고 홀가분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것들과 마주하게 되는, 어색함과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 갈수록 익숙한 대상에게 더 마음이 쏠리는 걸 느낀다. 의식은 아니라고 말해 보지만 무의식은 어쩔 수 없이 낯선 것을 밀어내고 점점 익숙한 것들에게로 기울어져 가고만 있다. 그러면서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고, 하루하루 꼰대로 변하고 있음을 체감하는 요즘이다.
낯선 환경 속으로 스스로를 내몰고, 켜켜이 내려앉은 세월의 더께를 살짝 덜어내는 행위로 여행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여행을 통해 젊음을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일상에서 찌든 마음은 조금이나마 정화될 거라 믿어본다.
여행이 주는 심리적 과정을 애써 구분 지어보면, 떠나기 전에 설레는 마음과 여행 중에 마주하게 되는 짜릿함의 순간들, 그리고 그 여정을 끝낸 뒤에 아련하게 밀려드는 향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콜라처럼 톡 쏘는 짜릿한 맛이 여행을 하는 동안 마주하게 되는 느낌이라면, 지금처럼 지난 여정을 조용히 돌아보는 것은 생두를 볶을 때 맡을 수 있는 구수하고 감미로운 커피 향에 가까울 것 같다. 맛이 직접적이라면, 향은 그 맛을 떠올려 상상하게 한다. 상상은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흥분시키는 힘이 있다.
생각해 보면, 여행 중에 어떤 대상을 직접 마주했던 순간보다도 차근차근 여행을 준비하던 과정과 여행에서 돌아와 그간의 일들을 떠올려볼 때의 느낌이 좀 더 강렬하게 작용하는데, 이는 아마도 상상이 지니고 있는 힘 덕분이라고 짐작한다.
지난밤 SNS 계정에 'go back to the real' (현실로 돌아가기)라고 썼다. 이는 휴가를 끝내고 일상으로 복귀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난 일주일 동안 보고, 밟고, 만졌던 것들이 실제가 분명한데도 문득문득 꿈 속인 듯한 느낌일 때가 있었기에 진짜(real) 같은 현실세계(?)로 돌아간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번 여행기간 동안, 가끔 꿈에서 갓 깨어나 얼떨떨한 상태인 채 '도대체 여기가 어딘가' 하고 멀뚱거리며 서 있는 기분일 때가 있었는데, 아마도 다음과 같 까닭일 것이다.
먼저, 이십 년 넘도록 소망해 왔던 캐나다 로키 지역에 두 발을 딛고 서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캘거리에 도착해 예약해 둔 차를 렌트하고 숙소가 있는 캔모어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길게 뻗어 있는 고속도로 위로 오렌지 빛 석양이 멋지게 물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오래도록 꿈꿔왔던 여행이 시작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 미국이나 유럽 영화의 주인공이 맑고 조용한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장면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언젠가는 영화에서 처럼 맑은 호수에서 수영해 보는 것이 작은 소망이었다. 그런데, 와우! 이번 여행에서 그런 일이 두 번 일어났다. 억지스럽지 않고 꽤 자연스럽게, 정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맑고 조용한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고 온 것이다.
트레킹을 마치고 더위와 피곤에 찌든 아들이 어디 가서 수영이라도 한번 하자고 졸라대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수영을 할만한 곳을 검색하고 재스퍼의 아네트 호를 찾아냈다. 아직 햇살이 따가운 늦은 오후, 아네트 호수에 도착한 우리는 비좁은 차에서 몸을 구겨 넣다시피 하여 수영복으로 환복 했다. 그리고 주뼛주뼛 찬물에 몸을 담갔는데, 좋았다. 아니 행복했다. 난데없이 수영을 하고 싶다고 졸라대던 아들보다도 소소한 꿈 하나를 이룬 내가, 더 짜릿한 행복을 만끽한 순간이었다. 조용하고 맑은 호수에 떠서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보고 있자니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꿈꾸고 있는 듯했다.
이번 여행이 꿈인 것처럼 느껴진 또 다른 이유는, 여행 내내 사방으로 펼쳐진 로키의 풍광들은 눈앞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도무지 현실 같지 않고, 마치 컴퓨터로 합성한 사진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사진엽서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있는 기분이랄까. 내 앞으로 펼쳐진 기가 막힌 풍경은 현실이 분명한데도 오히려 이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는 말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풍경이 전후좌우로 펼쳐져 있어 문득문득 꿈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꿈처럼 느껴졌다는 마지막 이유는 이러하다. 일정이 뒤로 갈수록 트레킹으로 인한 피로가 누적되어 여행 4일 차가 되자 꿈결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걷거나 잠시 멈춰 쉴 때도 마치 배를 타고 있는 듯 지축이 부드럽게 일렁거렸다. 함께한 아들도 증상이 비슷했는데, 아마도 누적된 피로와 로키지역의 높은 고도로 인한 일종의 고산병이라고 생각된다. (로키 지역은 지층이 융기되어 높이 솟아 올라와 있는 데다가, 보통 봉우리를 오르면 해발 2000~3000미터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어 현기증이 일어났을 거라 추측한다.) 아무튼 현기증 탓에 여행 후반부는 현실과 꿈속을 번갈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중학생 아들과 함께한 이번 로키 트레킹은 여러 의미를 가져다준다.
그렇지만 여행이 주는 개인적인 의미 따위는 구체적으로 기술하거나 정리하지는 않기로 한다. 이번 여행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고, 정리하는 것에 대해 몹시 피로감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여행의 의미’라고 쓰게 되는 순간, 기껏해야 동네 아저씨 정도로 밖에는 불리지 않을, 한 인물의 소견 따위가 괜히 거창하게 느껴져서, 어딘지 모르게 거북살스러운 것이다. 이건 마치 행인들로 붐비는 거리 한가운데에서 피에로 분장을 하고서 물끄러미 서있는 느낌이랄까. 생각만으로도 부끄러워서 스스로에게 코웃음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여행의 의미' 따위는 고스란히 혼자만의 감흥일 뿐, 타인은 개인적인 의미에 관심이 없거나 전혀 공감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뭐 어쨌다구요? 사실 저는 댁이 말하는 여행의 의미이나 여행의 감흥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댁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은근한 자랑이나 싸구려 감상으로 밖에 와닿지가 않아요.'라고 속엣말을 하며 시큰둥할 것만 같다.
그러므로 산행 도중 불과 몇 발자국 거리에서 야생 사슴을 봤다거나, 미어캣처럼 선채 우리를 경계하던 마모트(marmot) 무리 옆을 빙그레 웃으며 지나갔던 일과 바위 위에서 숨을 꼴딱거리며 간절한 눈빛으로 먹이를 던져주기를 바라는 다람쥐를 조용히 지켜봤다거나 큰 뿔 산양이나, 산양 혹은 코요테를 먼발치에서 보았다던지, 도로변에서 무심하게 풀을 뜯는 엘크 무리를 코 앞에서 본 일도, 여행 내내 아들이 보고 싶어 했던 블랙 베어를 찾아 사흘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마지막 날 블랙 베어 가족을 발견하고 흥분한 일과 이 세상이 아닌, 천상의 것만 같은 아름답고 웅장한 산과 호수를 보았다고, 에매랄드빛 맑고 아름다운 호수에서 아들과 함께 수영을 하고, 카누를 탄 일과, 근사한 숲길을 MTB를 타고 신나게 달렸던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한다. (이야기를 안 한다고 하면서, 결국 할 말을 다 쏟아내고 있는 꼬락서니 좀 봐라. 잘난 척 대마왕! 어쩔 수 없는 놈 같으니라고!)
하여, 이번 여행에서 있었던 작은 실수담 두 개를 꺼내보려 한다. 누군가가 어처구니없이 실수한 이야기는 재미있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재미가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 혹시라도 지루하다고 해도 부디 원망은 하지 마시길. 나란 사람은 본래 재미있는 편이 아니라고 미리 말해둔다. 사실, 살면서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꽤 노력을 한 것 같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시도 끝에 결국 알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이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 어쩌겠는가. 별다른 재미가 없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미안해, 폴>
캐다나에 도착한 다음날이었다.
새벽부터 오후 4시까지 이어진 트레킹으로 몹시 지친 우리는 먼저 온천욕으로 피로를 풀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다운타운으로 갔다. 트레킹의 첫날이라 조금은 특별한 저녁을 아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모름지기 특별한 것이란 대부분 돈이 들어가기 마련. 우리는 구글에서 '가우쵸'라는 브라질언 바비큐 식당을 찾아내고 '오늘 저녁엔 돈 좀 쓰러 왔어요.'라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들어섰다. 정장차림의 매니저가 데스크에서 점잖게 인사를 해왔다. 그는 내게 예약을 했냐고 물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no’라고 대답했다. 매니저는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웃음을 띠며 'okey, no problem'이라고 하고는 구석 쪽 빈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했다. 레스토랑을 한번 둘러보니, 내부장식이며 테이블과 의자 등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가격대가 있는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바비큐를 손에 든 종업원들이 다소 격식 있는 발걸음으로 이쪽저쪽 테이블 사이를 분주하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테이블에 앉자, 멋진 턱수염을 기른 종업원이 다가와 인사를 하며 자신을 폴이라고 소개했다. 히스패닉계인 폴은 말이 좀 빨랐고, 그의 남미식 영어발음은 가뜩이나 짧은 영어실력인 내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래서 좀 천천히 말해 달라고 부탁하자 친절한 폴은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으며, 'yes'라고 대답하고는 우리에게 브라질리언 바비큐를 먹는 요령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폴에게 이 식당이 처음이라 음식을 잘 모르니 사이드 메뉴와 무알콜 음료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가 추천한 사이드 메뉴와 음료는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메인 메뉴인 바비큐는 다양한 고기들이 끊임없이 구워져 나왔고, 그때마다 종업원이 오십 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칼로 조금씩 고기를 잘라주었는데, 고기의 종류에 따라 다르긴 했지만 대체로 맛이 있었다. 바비큐와 함께 찍어먹는 소스도 우리 입맛에 잘 맞아떨어졌다. 폴은 수시로 우리 테이블로 와서 음식은 괜찮은지, 부족한 건 없는지 물어보았는데, 그때 문득 떠올랐다. 캐나다에는 팁문화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아! 여기는 팁을 줘야 하는 거로구나. 그래서 우리를 담당하는 폴은 저렇게 웃는 얼굴로 친절하고 상냥하게 계속 물어보는 것이구나. 음, 그렇다면 계산하기 전에 미리 팁을 준비해야겠군.
미국에서의 팁은 음식값의 4~5% 정도 된다는 정보가 떠올랐다.(머릿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정보가 정확할 거라고 확신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습다. 아마 이 팁의 수치는 내가 배낭여행을 했던 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반이 아닐까 짐작하는데 이마저도 확실한 기억은 아니다.) 나는 친절하고 상냥한 폴에게 팁을 좀 더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팁을 5%보다 높은 7%로 올려주자고 마음을 먹었다. 음식값이 대략 150달러 정도 나올 테니, 팁은 7%인 대략 10달러 정도면 나쁘지 않은 금액이라 생각했다. 편안하고 배부른 식사를 모두 마친 후 폴에게 계산서를 달라고 요구했다. 계산서에 찍힌 금액은 세금을 포함해서 148달러. 여기에 10달러 팁을 더하면 총금액은 158달러.
마침 지갑에 있는 지폐와 호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까지 꺼내어 보니 모두 159달러가 조금 넘었고, 음식값과 팁으로 맞아떨어지는 금액이었다. 나는 액수가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왠지 좋았다. 별것 아니라 우습게 보일 수도 있지만, 가지고 있는 현금을 탈탈 털어보니 치러야 할 금액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뭔가 깔끔한 느낌이 들었고 그게 은근히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폴이 계산대 앞에서 다시 한번 웃으면서 즐거운 식사였는지 물었다. 아들과 나는 아주 만족한다,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하며 폴에게 148달러를 현금으로 건네었다.(물론 이 금액에는 주머니에서 탈탈 턴 동전 네댓 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팁 10달러는 따로 건네며 ’This is your Tip. Is it ok?' (이게 네 팁인데, 이거면 괜찮지?)라고 말했다.
그 순간, 폴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더니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아들도 이걸 눈치챘는지 레스토랑을 나와서는 폴의 표정이 뭔가 어색해 보였다고 했다.) 폴은 우물쭈물하더니 잠시 후 애써 'yes'라고 답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제야 나는 뭔가 잘 못되었음을 직감했다. 폴은 텅 빈 내 지갑(사실 허리춤에 매고 있던 크로스 백 속에는 현금이 많았고 신용카드도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현금은 동전까지 모두 합쳐서 159달러 하고 몇십 센트가 전부였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싸한 느낌으로 레스토랑을 빠져나와서는 얼른 휴대폰으로 구글을 열어, 검색창에 ‘캐나다 팁 문화’라고 입력했다. 아니나 다를까. 구글은 요즘 캐나다에서 적정 팁은 15~20% 사이라고 알려주었다.
아뿔싸!
나는 폴에게 적정 팁의 절반도 안 되는 금액을 주면서 꽤나 당당했던 것이고, 폴은 내가 동전까지 전부 꺼내서 액수를 맞추는 것을 보고는 암만 봐도 현금은 없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레스토랑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 부끄러움과 폴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들었다. 곁에 있던 아들도 '폴이 참 친절했는데, 아! 생각하니 미안한데.'라고 자꾸자꾸 되뇌고 있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그날의 미안함과 쪽팔림이 되살아난다.
더욱 미안했던 것은, 이후 음식점에서 계산을 할 때면 팁을 계산하기 복잡한 탓에 현금대신 신용카드만 사용했는데, 종업원이 건네는 신용카드 단말기의 녹색 확인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화면이 바뀌며 '팁 지불 버튼'을 누르게 되어있었다. 거기에는 15%, 18%, 20%, non, other 등으로 팁 선택하도록 구분되어 있었고, 손님은 자신이 주고 싶은 팁 비율을 누르면 자동으로 팁이 합산되는 시스템이었다. 평소처럼 신용카드로 결제했다면 폴에게 18%나 20%의 팁을 줬을 텐데.
이후 음식점에서 팁 지급 버튼을 누를 때마다 웃음 띈 폴의 둥근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미안했다. 다른 음식점에서는 폴만큼 친절한 종업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들도 식당 종업원 중에서 폴이 제일 친절했는데 팁은 가장 적게 줘서 미안하다며, 식당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올 때마다 자동인형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미안해, 폴. 내가 캐나다 팁 문화에 대해 잘 몰랐어. 알았다면 네게 실망을 주진 않았을 텐데. 북미는 처음이라, 내가 잘 몰랐던 거야. 내 무지함을 사과할게, 폴. 그 후로 식당에서 음식값을 지불할 때마다 네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어쩌면 그 마음과 지금 쓰는 이 글이 네가 제대로 받지 못한 팁의 대신일지도 몰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사과할게.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폴.
I'm so sorry. paul. I just didn't know about your country's culture. but I'm still sorry. paul.
그런데 폴, 지나고 보면 너와 나, 모두가 'It’s not a big deal'일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너는 그날 저녁의 당황스러움을 벌써 잊어버렸을 수도 있을 거야. 그날 밤, 동료에게 날 욕하면서 낄낄대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수도 있을 거야.
어쩌면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지나고 보면 많은 것들이 'no problem.'이고, ‘not a big deal'이라는 걸.
그렇지? 폴, 네가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믿을게. 그래야 비로소 내 마음이 편해해 질 수 있으니까 말이야.
폴! 이렇게 보면 나란 인간은 끝까지 이기적인 것 같아.
아무튼 폴, 네가 조용하고 깨끗한 그곳 캔모어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가길 진심로 바랄게.“
<골든룰>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에 속해 있는 골든(Golden)은 레이크 루이스에서 80km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시골읍 크기 정도되는 마을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캐나다 여행의 모든 숙소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을 했는데, 그때 발견한 숙소가 바로 골든이라는 마을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글맵을 통해 검색해 보니 '루이스 호수'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져 있어서 다음날 트레킹 장소로 이동하기에도 무난해 보였다. 또 숙소의 가격도 다른 지역에 비해 저렴했고, 사진을 통해 본 숙소 컨디션과 사용자의 리뷰를 봐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여, 클릭 몇 번으로 두 번째 묵을 곳은 골든에 위치한 숙소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부디, tvN의 영화소개 프로그램 '영화로운 덕후생활' 속의 코너 '아니었다'의 톤을 떠올려 주시길 바란다.)
숙소는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고, 내부는 콘도형식으로 에어비앤비 앱 속에 있던 사진과 거의 일치했다. 여느 숙소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편의시설 등은 대부분 갖추어져 있었고, 가전제품이나 주방용품 등은 모두 새것으로 보였는데, 심지어 최신 드럼 세탁기와 건조기, 식기 세척기까지 빌트인 되어 있어서 세탁과 설거지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다는 점은 꽤나 매력적으로 비쳤다. 사실 숙소의 컨디션만 따져보자면 며칠 동안 머무르기에는 조금의 모자람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엉뚱한 데 있었다.
골든으로 입성하는 여행 셋째 날. 트레킹을 끝내고, 역시나 피곤한 몸으로 차에 올라 내비게이션에다 주소를 입력했다. 루이스 호스에서 숙소가 있는 골든까지 58분이 소요된다는 걸 확인하고 출발했다. 운전을 하고서 30분 정도 지났을까, 운전하는 것이 꽤 신경 쓰이기 시작했고, 뭔가 좀 불편했다. 40분이 지나자 불편한 느낌은 서서히 걱정으로 변해갔고, 50분이 경과했을 무렵, 하염없이 브레이크와 가속페탈을 번갈아 밟아대며 한숨과 짜증 섞인 말을 수시로 내뱉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유는 이러하다.
지도상으로 보면 루이스 호수 주차장에서 골든까지의 거리는 83km, 소요시간은 58분이라고 되어있었다. 하지만 막상 운전을 해보니 루이스 호수에서 골든으로 가는 길은 끝도 없는 내리막으로 이어져 있고, 게다가 쉴 새 없이 이쪽저쪽으로 휘어진 커브길이라 운전의 피로도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평면으로 펼쳐진 구글 지도에 나와있는 거리와 시간 정도만 확인하고는, 숙소의 위치가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지, 70km가 넘게 구불구불 휘어진 내리막 길을 운전해서 가야 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2000미터 정도의 높이에서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미끄러져 내려오다 마침내 처박히듯 이르게 되는 곳이 바로 이곳 골든이라는 마을이구나,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더군다나 고된 트레킹으로 지친 탓인지, 시차 때문에 전날 밤 잠을 못 잔 탓인지 운전하는 내내 졸음과 싸워야 했는데, 잠시 차를 세우고 쉴 만한 갓길조차 마땅치가 않았다. 껌을 씹어도 보고, 소리 내어 노래를 부르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수차례 뺨도 때려보았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감당해 내기 어려웠다. 조수석에 탄 아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 벌써부터 차창 쪽으로 고개를 꺾고 기절한 것처럼 자고 있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 내고 억지로 운전하는 수밖에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골든으로 내려가는 한 시간 동안 고문을 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끝없이 내려와 처박히듯 도착한 골든(Golden)은 그 이름과는 달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 도로를 따라 길지 않게 이어진 다운타운에는 몇몇 상점과 술집, 모텔, 주유소와 편의점, 마트 등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고, 지난 몇 주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선지 마을 전체가 바싹 건조해져서 지나가는 차들이 일으킨 흙먼지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는 듯 보였다. 가끔 트럭이 굉음을 울림며 마을을 통과할 때마다 흙먼지 회오리가 날리면서 마을 안쪽까지 고스란히 퍼져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외관만 따지고 보면 마을의 이름은 골든(golden)이 아니라 확실히 더스티(dusty)라는 명칭이 더 어울려 보였다.
아무튼, 천신만고 끝에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한숨을 돌리고 나니 70km의 내리막 길을 이리저리 운전한 탓인지 현기증이 밀려왔다. 애당초 골든에서의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그저 다음 트레킹을 위해 이틀 정도만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잠을 잘 숙소의 역할, 그러니까 다음날 트레킹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전날 휴식을 취하는 정도가 전부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내일과 모레가 걱정되었다. 그건 오늘 내려왔던 만큼의 길을 되짚어, 끝없이 올라가야 한다는 뜻이고, 일정을 마치면 피곤한 몸으로 운전을 해서 끝없이 이어진 이 길을 또다시 내려와야만 한다는 말이었다. 이건 마치 시지프스의 형벌이라도 받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골든에서의 이틀은, 숙소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면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아침에 차를 몰고 꼬박 한 시간 동안 오르막 커브길을 달려가서는 다시 트레킹을 시작해서 2000미터가 넘는 산을 올랐다가 내려왔다. 그리고 저녁 무렵이면 또다시 1000미터 이상의 고도차가 나는 산 아랫마을 '골든'으로 끝없이 내려오는 숫한 커브길은 현기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때부터 아들과 나는 남은 여정 내내 현기증을 달고 다녀야만 했다.
저녁이 되면 힘든 트레킹으로 덥고 피곤에 지쳐선지 시원한 맥주가 당겼다.
로키산맥을 끼고 있는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주나 알버타주에선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주류를 판매하지 않았다. 대신 주류를 판매하는 상점이 따로 있었는데 편안한 기분으로 숙소에서 캔맥주라도 마시려면 주류상점을 찾아서 술을 구매해야만 했는데, 불편했다.
골든에 도착한 그날은 지난밤 잠을 설친 이유로, 트레킹으로 인해 피로가 쌓여서, 또 앞서 말한 운전으로 인해 기진맥진했다. 우리는 대충 짐을 풀어놓고, 샤워를 한 뒤 숙소 주변에 위치한 멕시코 음식점으로 갔다. 종업원이 추천해 주는 스페셜 메뉴를 시키면서 맥주 한 잔도 주문을 했다. 맥주가 테이블에 놓이자마자 잔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찬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기분까지 시원해졌고 그제야 '이제, 살 것만 같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맥주가 더 마시고 싶어졌다. 식당에서 마신 500cc 한 잔으로는 어쩐지 부족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아들은 먼저 숙소로 들여보냈다. 나는 구글맵을 열고 골든의 주류상점을 검색했다. 읍내에 주류상점은 딱 한 곳이 검색되었는데,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간은 저녁 8시를 막 넘기고 있었지만 햇살은 아직도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고, 기온은 30도에 근접하고 있어 더웠다.(북쪽에 위치한 로키지역은 6월에 5시 30분 정도에 해가 떠서 밤 10시경이 되어서야 겨우 해가 떨어졌다.) 걷기엔 좀 덥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숙소에 있는 푹신한 소파에 편히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실 생각에 열심히 걸었다. 이마께로 달려드는 햇살에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고,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너무 지쳐 힘이 풀린 두 다리는 마치 허공을 걷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15분이 흐른 뒤 마침내 주류상점에 도착했다. 힘껏 출입문 손잡이를 당겼지만 덜컥거리는 소리만 울리고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반대쪽으로 출입문을 밀어도 보았지만 역시 열리지 않았다. 가게를 주욱 훑어보니 전면 통유리에 'closed'라고 적힌 팻말이 조그맣게 붙어 있었다. 오후 8시 17분이었다.
'아직도 해가 한창이고, 날이 환한데 벌써 문을 닫다니.... 이런!'
구글맵에서 그 가게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보니 영업시간은 아침 9시에서 저녁 7시로 나와있었다.
'모름지기 술이란 저녁이나 밤에 당기는 것이고, 사람들은 이 시간대에 주로 술을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일찍 문을 닫다니, 이런 배 부른 캐나다 놈들! 이런 골든 같으니라고!'
하는 수 없이 왔던 길을 터덜터덜 되돌아와야 했다. 너무도 힘들고 지친 탓인지 화도, 짜증도 나지 않았고 머릿속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는 '멍청이' 상태로 다운타운을 지나는데, 게시판에 부착된 골든의 홍보 베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Golden rule!"
마을의 슬로건인 듯 골든룰이라는 타이틀이 빨간색으로 크고 굵게 인쇄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골든에서 보고 즐길 것이 적혀 있는 것 같았다. 그 골든룰이라는 단어를 접하는 순간 갑자기 허! 하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고, 나는 조용히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제기랄, 로키지역을 여행할 때 꼭 알아야 할 골든룰을 알려주지. 그건 되도록 골든에는 숙소는 잡지 말라는 거다.
This is golden rule of rocky mountains area. You know what I am saying? huh!(이게 바로 로키 지역에서의 골든룰이다. 이것들아! 알겠냐?)
뭐 그래도 기어이 골든으로 오겠다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장 70km의 구불구불거리는 내리막과 6월이면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그야말로 휑한 시골마을 하나를 만나게 될 거라고 미리 말해두지. 그래도 의심된다면, 가보시라.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골든을."
억지로라도 골든의 좋았던 점을 하나 꼽으라면, 졸음과 싸우며 끝없이 내려오는 그 길 끝에서 큰 뿔 야생양 무리를 봤다는 것,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골든에서의 이틀에 대해 이렇게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 정도다.
(쓰고 보니 골든이라는 마을에 대해 뭘 안다고, 기껏해야 이틀의 경험을 가지고 지껄여댄 것이 정말 미안해진다. 사실, 골든에는 최근 만들어져 인기를 끌고 있는 '스카이 브릿지'라는 관광명소가 있고, 버펄로나 야생늑대를 만날 수도 있으며, 겨울이면 스키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그저 이야기에 재미를 주기 위해 골든을 소재로 다소 극단적으로 몰아간 것이니 혹시라도 당신이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골든이라는 마을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분이거나, 골든이나 혹은 그 주위에 살고 있는 주민이라면 정중하게 사과드리는 바이다. 그저 쥐뿔도 모르는 지질한 여행자의 아주 단편적이고 편협한 생각이라고 여겨주시기를. 그저 지극히 주관적이면서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여겨주시길.)
자, 이제 이야기를 마칠 시간이 된 것 같다. 쓰다 보니 길고 지루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듯해서 괜히 부끄러워진다.
23년을 직장에 다니며 내리 9일을 쉬어본 적도, 9일 동안 여행을 떠나본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이라 그런지 휴가를 내는 것이 많이 어색하고 자꾸 눈치가 보여 망설여졌다. 요즘은 예전과 달리 직장에서 휴가를 쓰는 것에 눈치를 많이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길다면 긴 휴가를 내자니 조심스러웠다. 위로도, 아래로도,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휴가 결재를 올리는 것에도 딴에는 작은 용기가 필요했다.(요즘 들어 50대 초반의 내 또래들을 보면 위로도, 아래로도 눈치를 보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씁쓸해질 때가 있다.)
지금은 여행을 마치고 직장으로 복귀한 월요일 아침.
정말 긴 꿈을 꾸고 이제 막 깨어난 기분이다. 어리벙벙한 채로 업무를 처리해내다 보니, 일상으로 삼분의 이 정도는 넘어온 것 같다. 방금 배를 타고 내린 것처럼 가볍게 일렁거리는 현기증은 여전하다.
어젯밤 늦게 현관에 들어서서 아내와 딸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익숙했던 거실을 한번 둘러보면서,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엔딩에서 했던 도로시의 대사가 불쑥 떠올랐던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There's no place like home.“
(내 집만큼 좋은 곳은 없다.)
”There's no place like home.”
(내 집만큼 좋은 곳은 없다.)
그래,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거야. 제법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도로시처럼 스르르 알게 되는 거지. 지루했던 일상도 제법 고맙게 느껴진다는 걸.
* 쓰고 보니 군데군데 영어가 섞여 있는 것이 좀 거슬린다. 아무래도, 장장 9일씩이나(?) 캐나다 물을 먹은 결과인가 보다. ㅋㅋ
이거 이거, 캐나다에서 서너 달 살다가 돌아오면, 그땐 완전히 네이티브 스피커가 되겠는 걸.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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