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꽃을 참 좋아한다.
놀라운 사실은 20년 넘게 아내와 살면서도 아내가 꽃을 찐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거다.
그냥 '꽃을 좋아한다.' 딱 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꽃다발을 아내에게 내밀었을 때 돌아오는 것은 '쓸데없이 비싸게 주고 꽃을 샀다'는 핀잔이 일쑤라, 아내가 찐으로 꽃을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구나,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삼 년 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오고부터는 일주일마다 새로운 꽃이 거실과 서재 한쪽에 꽂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에 의아해진 나는 전에 없이 갑자기 웬 꽃이냐고 물었고,
이 말에 아내는 쓴웃음을 한 번 짓더니 잠시 뜸 들인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에 살던 집은 공간도 정리되지 않았고, 낡고 협소해서 도무지 꽃을 꽂아둘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이사 오기 전까지는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비싼 꽃을 매주 꽂아둘 경제적 여유도 없었는데
새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니 깔끔하게 정돈된 공간이라 꽃을 화병에 꽂아두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게다가 이제 아이들이 제법 크고 보니 심적으로도 여유가 생겼고, 무엇보다도 집 근처에 5천 원에서 7천 원 정도의 가격으로 조그만 꽃다발을 통에 담아 두고 파는 무인노점이 생긴 뒤부터 부담 없이 매주 꽃을 사는 거라고 말했다.
아내는 새초롬한 얼굴로 화병에다 코를 대고 꽃 향기를 맡더니,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사실, 내가 어릴 적부터 꽃을 얼마나 좋아했었는데..."
아내의 이 말에,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아내가 이토록 꽃을 좋아하고 있는지 까마득히 몰랐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거실과 서재에는 작은 화병에 예쁜 꽃들이 소박하게 꽂혀 있는 걸 볼 수 있었고, 새로운 꽃이 화병의 담길 때마다 아내는 그 꽃을 쓰담쓰담하며 환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내가 모르는 꽃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아내의 행복한 웃음을 보게 되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고, 소소한 행복이 잔물결처럼 밀려들었다.
또 집안 곳곳에 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싫지 않았다. 아니 꽤 좋았다.
그렇게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고, 6월이었고, 지난 주말이었다.
아내와 집 근처 숲길을 가볍게 산책하고 내려오던 중이었는데, 길섶에는 군데군데 하얀 개망초 꽃들이 보기 좋게 피어있었다.
아내가 내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개망초 꽃을 조금 꺾어 가야겠다고 은밀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주에는 어쩌다가 꽃을 못 샀는데, 주변에 핀 개망초 꽃이 너무 예쁘니, 조금 꺾어서 화병에 꽃아 두겠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핀잔을 줬겠지만 생각해 보니, 개망초 꽃은 관할 시에서 심고 가꾸는 꽃도 아니고 이 맘 때면 산에 들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야생초니까, 조금 꺾어간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겠다 싶었다.
하여 짐짓 못 이기는 척 동조하게 되었고, 아내가 조심스레 개망초 꽃을 꺾는 것을 묵인했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없는 틈을 타서 아내는 얼른 한 움큼 정도되는 개망초 꽃을 꺾었다.
꽃을 꺾고 있는 아내의 얼굴에서는 개망초 꽃에 대한 미안함과 꽃을 곁에 두고 보고 싶다는 욕망이 교차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행여 남들이 이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지는 않을까 하는 여러 갈등이 혼재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게 도둑질을 한 사람처럼 쫓기듯 숲길을 내려오고 있는데, 뒤에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저기요! 저기요!"
우리는 뒤를 돌아보았고 사십 대 초반 가량의 한 여성이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과 함께 계단참을 내려오며 우리를 불러 댔다.
"저기요! 그렇게 꽃을 꺾어 가시면 어떻게 해요. 다른 사람도 보는 꽃인데.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꽃을 볼 수 없잖아요!"
교양 있고 점잖은 말투였지만 단호하고 매서웠다.
그렇지 않아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아내는, 여자의 이 말에 당황했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리고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여자에게 '죄송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꽃이 필요하시면 꽃집에서 사셔야지요. 그렇게 꺾어가면 어떻게 해요!"
"여기 우리 아이가 도대체 뭘 보고 배우겠어요."라고 당차게 꾸짖어 왔다.
이에 아내는 또다시 부끄러움에 휩싸인 채 한번 더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는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여자가 내뱉은 첫마디에서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이어진 두 번째 말에서 약간의 모멸감 내지는 모욕감을 느꼈고, 여자의 마지막 말에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여자의 말들을 곰곰이 생각을 해보게 되었고, 깊숙한 곳으로부터 밀려드는 다음과 같은 의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과연, 우리 부부는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여자의 말은 정말 타당한 것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내는 부끄러움과 모욕감에 휩싸여 입을 다물고 있었고, 나 역시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인해 스멀스멀 화가 나려고 했다. 하지만 화를 내고 싶은 마음보다 이런 의문이 머릿속에서 더 크게 맴돌았다.
길가에 핀 개망초 꽃을 꺾은 것은 과연 잘못된 행동인가? 또 아내의 행동이 확실히 잘못된 일이라 굳게 믿으며, 가차 없이 상대의 잘못을 콕 집어 말하는 여자의 행동은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슬며시 훔쳐본 아내의 표정에서는 여전히 부끄러움과 불쾌감이 혼재되어 있었고,
손에는 개망초 꽃 한 움큼이 어정쩡하게 쥐어져 있었다.
그렇게 씁쓸한 마음으로 차를 주차하고 걸어오는 길이었다. 문득 시선이 멈춰진 곳은 집 앞 공원 외진 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하얀 개망초 꽃들이 군락을 이루고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게 아닌가.
이 길을 여러 번 지나다녔지만 외진 곳이라 그런지 딱히 관심도 두지 않았던 터라 그때까지는 그 존재조차 의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홀로 카페에서 앉아 책을 보려 했지만 오전에 있었던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내와 나는 무엇을 잘못한 것이고, 그 여자가 했던 말은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 되짚어 보았다.
처음에 창피하고 부끄러웠던 마음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여자의 논지에 대해 하나하나 반박하고 싶어 졌고,
아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여자가 편협하거나 아집에 사로 잡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첫째, 개망초 꽃은 누군가가 심어둔 꽃인가?
아니었다. 산이나 들녘에 자생하는 풀꽃이다.
일제강점기 때 철도를 깔기 위해 미국에서 침목을 들여오면서 이 꽃이 번성하였는데.... 이를 두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심었다고 와전되어 망국초(개망초)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쨌든 이 꽃은 야생에서 자라는 꽃이지, 시정 당국에서 심고 가꾸는 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는 최소한 타인의 소유나 공공재를 훔치거나 훼손하지는 않았다.
여자는 아내를 향해 공공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함부로 훼손하는 사람인 양 몰아세웠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서는 분명 눈살을 지푸릴수도 있는 일이 지만, 분명한 것은 결코 아내는 개인이나 공공기관의 소유나 관리대상을 훔치거나 훼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생명을 혹은 자연을 해한 것은 맞다고 할 수 있겠다.
여러 사람이 보고 지나가는 측면에서 본다면 공공재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애매한 부분인 있어 여자의 주장에 타당성을 실어주기 힘들 것 같았다.
두 번째, 여자는 자신의 판단이 틀림없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스스로 판단한 사회적 규범을 어기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내를 향해 따끔한 지적질을 하고, 이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오히려 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생각해 보면, 여자는 꽤나 오만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꽃이 필요하시면 꽃집에서 사셔야지요. 그렇게 꺾어가면 어떻게 해요!'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상대를 상식 밖의 사람으로 끌어내리는 의도와, 상대를 조롱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아마 여자는 평소 사회규범을 잘 지키고, 꽤 정당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일 것이고, 더 나아가서 타인 또한 자신과 같은 바른 생각과 행동을 따라야 한다고 은연중에 가지고 있거나, 평소 자기 우월감이 높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다.)
또한 여자가 뱉은 마지막 말(자기 아들이 우리의 행동을 보며 뭘 보고 배우겠냐는)을 통해서 우리를 조롱하는 것을 넘어서, 어쩌면 자신의 당당함이나 정당함을 아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약간의 쾌감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의 말이 다 끝났을 때 여자의 아들은 쑥스러운지 멋쩍게 웃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여자의 말에 오히려 이렇게 반문해 본다. 여자의 아들은 엄마의 말과 행동을 통해 무엇을 배우게 될까?
여자의 아들은 별생각 없이 엄마의 이런 논지가 그저 맞을 것이라고 믿게 될 가능성이 높고, 이런 엄마로부터 공익을 위하고, 사회적 정의와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반듯한 생각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반면, 타자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에서는 점점 멀어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 엄마가 옳다고 믿고 내뱉은 말은 상대에게 상당히 폭력적이었음을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자칫, '우리 엄마는 정당하게 할 말을 하는 멋진 사람이구나'라는 일방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혹시라도 타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편협할 수도 있는 엄마의 주장이 의식, 무의식으로 각인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여자를 통해 편협하고 일방적인 가치관을 점점 키우게 되는 것은 아닐까.
타자에 대한 여러 관점들을 배울 기회를 점점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여자를 통해 그 아들이 배우게 되는 것은 안타깝게도 아집과 편협과 일방성이지 않을까 하는 억측을 해보았다.
스스로를 돌아보니,
나 또한 살면서 학교나 집단, 기업으로부터의 교육을 통해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심'을 길러 왔고, 또 이런 '분별'이 대부분 옳다는 확신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그래선지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면 자연스레 '분별' 하려는 경향이 강했던 것 같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하면 좋은 것, 하면 나쁜 것 등을 구분하려 하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강화시켜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이를 먹고 보니, 이런 분별심은 때로는 심도 깊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로막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타자를 분별하려 하기보다는, 모호한 타자이지만 함부로 단정 짓지 않으며,
가급적 타자에 대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이해의 노력을 해보려고 한다.
맞고 틀리고, 혹은 옳고 그름으로, 타인과 내 세상을 이분하는 순간,
세상과, 타인과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해 왔는지도 모른다.
이번 일을 개기로 다시 한번 겸손을 배운다.
나 또한 타자와 세상을 내 잣대로만 평가해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본다.
카페에서 이런 생각을 이리저리 정리하다가, 의견을 구하기 위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친구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ㅋㅋㅋ 사실말이야, 오늘 벌초를 하고 왔는데, 선산에 개망초 꽃이 지천으로 널려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예초기로 베어낸 개망초 꽃만 수백수천은 될 것 같은데... 거기에 비하면... ㅋㅋㅋ"
집에 돌아오니, 거실 화병에 개망초 꽃이 소박하지만 예쁘게 꽂혀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오늘 아침, 시끄러운 모터소리에 무슨 일인가 하고 창 밖을 내려다보니, 공원 공터에서 인부들이 예초기로 개망초 꽃을 척척 베어내고 있었다.
순식간에 예쁜 개망초 꽃밭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글의 소재가 된 개망초의 꽃말은 '화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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