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었다.
3월 초순의 거리에는 햇살이 살며시 내려앉아 있었고 모처럼 봄의 따스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매년 이맘때면 곳곳에 목련이 하얀 촉을 반짝거리며 자태를 뽐내고 있을 터인데 아직까지 하얀 목련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도 2월 중순부터 장마철처럼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들이 이어진 탓이리라.
그래도 얼굴에 따사로운 봄볕이 머무는 느낌이 좋아서 잠시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태양이 소중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며 '태양 에너지는 참 좋은 것이로구나'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바로, 지난여름 강렬한 햇볕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무더위에 지친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덥다, 덥다, 투덜대며 햇빛을 피해 그늘을 찾았는데, 찬 겨울이 되면서부터 자연스레 햇볕을 찾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스스로 참, 간사(奸詐)하다는 생각이 들어 픽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변함없는 태양을 대하는 태도가 계절에 따라 이러한데, 다른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평소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도 항상 좋은 사람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황과 때와 장소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될 수도, 나쁜 사람이 될 수도, 내게 중요한 사람일 수도, 별 상관없는 그저 그런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상황이 바뀌고 조건이 바뀌면 대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언제든지 바뀔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십이 되고 보니, 이젠 사람 마음이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조용히 인정하게 된다.
똑같은 태양이지만 여름과 겨울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른 것처럼 계절에 따라, 장소에 따라, 기분에 따라 대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과 타인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음을 아는 나이에 다다른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불교에서는 이를 무상(無常)이라고 한다.
무상(無常)이라는 단어를 다음(daum) 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1. 모든 것이 아무 보람도 없이 헛되고 덧없음
2.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고 늘 변함
3. (불교)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대부분 무상이라는 단어는 다음 사전의 첫 번째 뜻인 '헛되고 덧없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지금껏 살아보니 인생이 무상하다(헛되고 덧없다)는 걸 알겠다.'라고 쓰는 경우이다. 하지만 한자 그대로 해석해 보면 무상은 '없을 무(無)', '항상 상(常)'을 쓰고 있음으로 '늘 같지 않다.' 혹은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해석이기에 다음(daum) 사전에서의 2번과 3번의 풀이가 더 정확할 것 같다.
세상은 늘 변하고, 이전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즉, 인생이 무상하다는 말의 의미는, 생은 항상 같지 않고 변하며, 어제와 오늘의 의미가 시시각각 달라지기에 어제와 오늘,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 대해 크게 집착하지 않는 태도로 생을 맞이하며 스스로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은 언제나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뜻으로 다가온다.
어쩌다 보니 영화 '파묘'를 두 번을 보게 되었다. 한 영화를 한 주에 두 번이나 보게 되니, 두 번째 관람은 여유를 가지고,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 파묘에 등장하는 몇 가지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있어 여기에 소개를 한다.
먼저, 대통령 장례까지 맡을 정도의 정통(正統)을 계승하고 있는 장의사인 고영근(유해진 분)이 기독교 신자이며 교회에서 장로까지 맡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아이러니해서 그 자체가 재미있다.
두 번째는, 무당인 윤봉길(이도현 분)이 혼수상태로 있는 병실 장면에서 무당 자혜(김지안 분)가 닭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자 광심(김선영 분)은 '교촌은 잘 먹으면서...'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푸흡하고 갑작스러운 웃음을 유발하는데 이것은 살아있는 닭이 오늘 죽지 않았으면 하는 자혜의 순수한 마음이지만, 평상시는 교촌치킨을 좋아하는데서(치킨을 먹으려면 살생이 수반되어야 하는 필연) 나오는 아이러니이기 때문에 우습기만 하다.
세 번째는, 영화의 종반부에서 지관 김상덕(최민식 분)이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독백 장면이다. 김상덕의 제법 긴 독백의 마지막 순간에 생각이 났다는 듯 이렇게 내뱉는다.
'아참, 딸 결혼식!'
이 장면은 얼마나 기막힌 아이러니인가. 체념한 듯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려 하지만, 문득 그럴 수 없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 이렇게 순순히 죽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아이러니는 조건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지는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데, 이를 보는 관객은 그런 상황에 대해 공감하게 되고,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면서 웃음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아이러니, 즉 모순이나 부조화의 상황은 앞서 말한 무상(無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즉, 영원한 것은 없으며 상황에 따라, 때와 장소 그리고 그때그때의 기분이나 분위기에 따라 늘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것이 인간의 마음과 세상의 이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옳고 그름의 경계는 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모호하고 희미해지고, 그 해석 또한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닭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진심이요, 교촌치킨을 먹고 싶은 마음 또한 진심인 것이다.
기독교를 믿는 마음도 진심이요,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미신인 우리의 전통 장의사 역할을 생업을 위해 계속하는 것도 진심인 것이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관의 태도와 그래도 딸 시집은 보내고 죽어야겠다는 욕심 또한 진심인 것인데, 이렇게 서로 모순 혹은 상반되는 이 마음은, 따져보면 같은 사람에게 나온 마음임을. 다르지만 결국은 다르지 않은 마음임을. 이것이 바로 아이러니요, 무상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런 부조화의 상황들이 불쑥불쑥 솟았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와 타자들의 마음이 돌변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혼란 속에서 하루하루를 기어이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더러운 세상, 야속한 세상, 뜻대로 안 풀리는 세상이라고 욕하고 푸념해 보지만
생존은 우리의 본능임으로, 아이러니와 무상한 세상을 오늘도 살아간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이렇게 주문을 외워보는 것은, 작고 약한 인간이라서다.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좋은 일이 있겠구나, 좋은 일이 있겠구나! 아주 좋은 일이 있겠구나, 지극히 좋은 일이 있겠구나! 아! 기쁘다.)
《천수경》의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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