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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지난 달 30일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참으로 조용하시고 점잖으신 분이셨습니다.

내게 어릴 적부터 참 잘해주셨고 그건 내가 어느정도 커서도 변함이 없으셨지요.

 

근데

장례식장에서 눈물이 나지않더라구요.

이상하다 했지요. 그대신,

조용히 그리고 길게, 할머니를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당신을 마지막으로 본것은 나였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당신은 허공을 향해 자꾸 손을 뻗어 올렸는데...

감히 당신의 손을 잡아드릴 용기가나질 않더군요..

그때 저는 속으로 자신이 참 정이없는 매정한 놈이라 생각했지요.

병실을 나오기 전에 마침내 할머니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어요.

순간 뭔가 가슴에 와 박히는 것 같더라구요.

그게 마지막이였어요.

 

요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는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양복점에 가서 하얀 와이셔츠를 맞추고 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피곤이 밀려와 침대에 누웠는데...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 때문에요..

 

바로 그때 엄마로 부터 전화가 왔어요... 할머니가 위독하시다고..

그리고 몇십분 뒤에 다시 엄마가 울며 전화를 했어요..

창욱아! 할머니 돌아가셨다..  

 

집에서 나와 장례식장으로 걸어가면서

저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머리에 총알이라도 꽉 박힌듯  

비척거리며 시내을 가로질러 갔습니다.

정말 아무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공허하다는 말이 진정 실감날 정도로.

 

 

할머니는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고

일본에서 할아버지와 만나 약관의 나이에 결혼을 했더랬습니다.

해방이되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3살된 아들(내 아버지)을 데리고 한국으로 건너왔습니다.

6.25 사변이 터지자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는 전쟁의 불길 속으로 스스로 뛰어 드셨고

두분 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언제 돌아가셨는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알 길이 없고.. 다만 누군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했답니다.

덕분에 할머니는 원호가족으로 등록이 되어서 원호청(지금의 보훈청)에서 연금을 타게 되셨지요.

그나마 그 연금은 가난한 집에는 단비와도 같았겠지요.

 

어쩌면 할머니의 꽃다운 시절은 남편없이 홀로 고모와 아버지를 고생고생하며 키우느라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당신은 몰랐을 겁니다.

아니, 불현듯 청춘의 꽃잎이 다떨어지고 나서야 이미 오래전에 꽃은 떨어졌음을 알았겠지요.

  

할머니는 과수원을 하셨는데...그게 여자 혼자 하기에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집안은 점점 기울어져만 갔더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철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어요...  

그때 어쩌면 할머니는 속으로 당신이 참 박복한 팔자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머니는 산통(계)을 하셨는데요.. 천성이 모진 사람은 못 되었죠.. 그래서 산통이 깨지면

빚쟁이에게 가서 돈을 제대로 못 받았어요.. 하지만 빚을 받으로 오는 사람에겐 돈이 있다면

돈을 갚아주셨죠....

 

아버지는 할머니의 모질지 못함에 대한 댓가를 고스란히 뒤집어 쓰셨죠..

빚쟁이가 수시로 집에 들락날락 하는 걸 보시면서 자랐죠.

고모는 미모가 출중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할머니가 얼른 시집을 보내셨어요.

당시 군장교 출신인 사람과 혼인을 시키신 거죠.

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했는데 고모부가 나이도 많고

당장 돈도 없는데 어떻게 시키냐는게 그 이유였지요.

그래도 할머니는 빚을 내어서 결혼을 시키셨나봐요..

그렇게 결혼을 시켰건만 고모는 시집을 가서는 혼수가 작다는 한소리를 들어야 했지요.

 

아버지가 엄마와 결혼을 할 즈음에는 집의 가난은 극에 다랬다나봐요.

엄마가 시집을 오고 얼마 안되어 빚잔치를 했데요...

엄마는 그런 가난을 보는 것이 참말로 싫었데요..

아버지도, 엄마도 가난을 더 부추긴 할머니가 좋을 리가 없었겠죠.

 

그래도 할머니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문상을 오신 분들이 다들 그랬어요. 할머니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고집이 센 내게도 참 잘해 주셨어요.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자 그렇게 좋아 했데요.

지금 집에는 내 이름을 작명에 대한 서류가 있는데..

그것도 할머니가 대구에서 당시 유명하다는 철학관을 찾아가서 지었데요.

 

할머니는 반평생이 훨씬 넘도록 혼자 사셨어요. 하지만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는 일은 없었지요.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아, 대구의 큰 식당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을 하셨어요. 

홀로 사시면서 아버지가 결혼을 하고 회갑연을 치루기 전까지 몇 십년을 식당에서 일을 하셨어요.

  

어릴 적 나는, 우리 할머니가 부자인 줄로만 알았어요.   

할머니는 오실 때마다 만원짜리 한장을 주셨고 명절 때는 3만원을 주셨거든요.

그리고 봄 가을이면 가끔 제게 보약을 해주셨어요.

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오시면 맛있는 걸 많이 사 주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철없었다 싶지만..
대학교 다닐때도 대구 할머니에게 놀러갈때면 용돈을 얻었더랬어요.

결혼하기 전에 집사람과 함께 할머니 집에 갔을때 할머니는 주머니속에 든 용돈을 꺼내어 들고

우리에게 고기를 사주셨어요.

그런데 전 할머니에게 용돈을 많이 드리진 못했어요.

 

불행이도

내가 직장을 잡았을 때부터 할머니는 치매 끼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다행히 그때는 내 동생이 할머니와 함께 살았지요.

동생은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며 조용히 울더라구요.

동생이 할머니와 함께 살때.. 말이 안 통하는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하며 많이 뭐라 그래서..

그게 가슴에 걸려서 그런 가봐요. 

 

결국 동생이 결혼하면서 치매끼가 있는 할머니는 대구에서 창원으로 오셔야만 했어요.

더이상 홀로 사시는 것이 걱정이 되었던 부모님의 결정이었어요.

할머니는 창원에 내려오고 싶어 하시질 않았어요.

친구들도 없고.. 친척들도 없고...

창원에 내려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똥을 싸는 할머니에게 엄마가 잔소리와 구박을 퍼붓고 난뒤면

조용히 내게 다가와 대구에 데려 달라고 했어요.

하!

 

몇년을 부모님과 할머니가 함께 살았는데..

엄마의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엄마는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버지도 엄마보단 덜했지만... 치매가 있는 할머니로 부터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았구요.  

엄마가 야단칠때마다 울상짓던 할머니의 표정이 떠올라요.

난 엄마가 미웠지만 한편으로 이해도 됐어요. 그래서 엄마에게 따지고 들수 없었죠.

할머니를 보살피는 건 내가 아니라 엄마였던거죠.

할머니만 불쌍해 보였어요. 

할머니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는 웃음이 숨어있었어요.

 

당신의 손자를 보며 알듯 모를 듯한 웃음을 빙그레 지으시던 할머니. 

당신의 증손녀를 보며 말없이 웃으시고 하시던 할머니.

늘 조용하시던 할머니.

그렇지만 당신의 끓는 세월을 속으로 삭혔던 할머니.

 

그 할머니는 이제 없습니다.

하얀 재 몇십줌이 되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고향 땅  

그곳의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주 아주

가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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