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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시절의 놀이를 강구야! 합니다.

 제목에 나오는 강구야! 가 무슨 뜻이냐구요?
그렇다면 찬찬히 읽어 보세요. 저의 추억으로 여러 분을 안내합니다.
 
  
 며칠 뒤면 설날이다.
설날! 어린 시절의 "설날"은 내게 '설렌다' 할때 설날,
그러니까.. 설레이는 날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설날은 여러 모로 동심을 설레게 만드는 날이었다.
떡국 먹고 나면 나이 한살 더 먹는 다는 설레임,
그리고 차례상에 놓이고 나서 곧 입안으로 들어오게 될 풍성한 음식들에 대한 설레임
간만에 대구에서 내려오실 할머니가 주시는 만원짜리 세뱃돈에 대한 설레임(아버지 어머니는 세뱃돈으로 한번도 1만원권을 우리에게 꺼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빠듯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세뱃돈을 손아귀에 꼭 쥐고 동생과 함께 마산 장군동 시장으로 장난감이나 각종 화약류등을 사와서 또래들과 함께 터트릴 것을 생각하는 설레임 등이 바로 어린시절 설날이 지닌 의미의 전부였다.
하여간 설날이 다가오면 늘 어린 마음 속에서는 깃발처럼 펄럭거리는 설레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즈음 "설"이 지니는 의미는 많이 바뀌었다.
설은 전통명절의 의미를 벋어나서 이제는 회사를 며칠 쉴 수 있는 날, 
운이 좋다면 5일, 그렇지 않다면 하루 밖게 못쉬는 의미와 
흩어진 친지 가족들의 얼굴을 한자리에서 볼수 있는 날
그리고 정말 재수가 좋다면 학창시절의 친구들 중 몇몇과 모일수 있는 그런 날.
이것이 요즈음 내가 느끼는 솔직한 '설날'의 의미인 것이다.
 
설의 의미가 낯설다는 말에서 나왔듯이 요즘은 어린 시절과 비교해보면 설의 본래 의미처럼 확실히 낮설어져 버렸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요즈음 맞이하게 되는 "설"보다 어린시절 돌아오는 '설'이 훨씬 더 강한 기대와 설레임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설"의 의미는 아무래도 예전과는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을 것이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해, 설이 지닌 느낌은 아무래도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을 심어 주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예전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 없고, 현실에서 예전과 같은 느낌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기에, 혹은 현재의 삶이라는 것이 아무 생각없이 살수 있던 어린시절 처럼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저 멀리서 펄럭이고 있는 아련한 기억에 대한 소중함과 설레임을 다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전, 한 겨울에 먹었던 찹쌀 떡의 그 맛을 지금, 이 현실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법이 듯
우리의 기억 언저리에 남아 있는 추억 또한, 도무지 현실에서는 찾을 수 가 없는 것이다.
     
 
 80년 대,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그 시절.. 마산 중앙동 시영아파트 단지는  
늘.. 그 시절의 다채로운 놀이문화를 구경할 수 있었다. 
여기, 내 기억 속에 오롯히 자리잡고 있는 추억의 놀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딱지(동그란 종이딱지)는 어떠한가? 얼마나 많은 놀이의 방식을 지니고 있었던가?
3장 안에 숫자 높기, 3장 안에 별 많기, 3장 안에 글자 많기, 에또..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계급높기라는 게임방식(그림에 머리카락, 모자,안경, 검은수염, 흰수염, 태극마크 등의 순서대로 승리하는 방식)  
날려먹기(멀리 날리는 사람이 승리자), 손가락으로 튕겨먹기, 손바닥으로 뒤집기, 입으로 불어서 넘겨먹기 등등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놀이 방식을 지닌 게임이 바로 딱지였다.
 
 한번은 내가 동네아이들의 딱지를 모두 접수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2천장 정도였다. 이 2천장의 딱지를 모두 따게 되었을 때 그때의 기분이란 정말 세상을 다가지고 있는 듯한 기분인 것이다. 이건 어른이 된 지금은 여간해서는 맛볼 수 없는 황홀하고도 짜릿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인 것이다.  
하지만 딱지의 진짜는 바로 이제부터 인거다. 딱지 2천장 중에 나의 본전은 쟁여두고 나머지를 들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간다. 그러면 저 아래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마치 로마시대의 카이사르처럼 전쟁에 큰 승리를 하고 돌아와 시민들 앞에 서있는 느낌을 받는다.  또한 카이사르가 자신의 재산을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 듯이 나는 달뜬 마음과 미소로 승리자가 배푸는 의식을 거행한다. 처음에는  조금씩 조금씩 딱지를 아래로 날린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걸 주우려고 이리저리 쫓아 다니게 되는데, 이때 아파트 옥상에 있는 나의 마음은 그야말로 영락없는 카이사르가 된거다.    
조금씩 딱지를 뿌려대다가 마침내 나는 이렇게 소리친다.
강구야!!
그리고는 한움큼 쥔 딱지들을 백장 정도씩 뿌리는 거다. 그 많던 딱지를 한꺼번에 뿌리는 것이다.
그건 세계최고의 부자가 돈비를 날리는 것과  
그때의 그 가슴에서 전해오는 짜릿하고 황홀한 그 느낌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강구의 뜻을 유추해보면 이렇다.
강구는 바퀴벌레의 사투리다.
그러니까 강구야! 라고 소리치며 딱지를 날리는 것은
바퀴벌레를 부르는 것이라 짐작한다.
다시말해 내가 딱지를 뿌릴테니 바퀴벌레처럼 떼지어 몰려 들어라~~ 이 바퀴벌레같은 자식들아!

 두번째, 딱지치기(노트나 종이를 찟어서 만들던 딱지를 말한다.)
얼마나 많은 공책과 노트의 표지를 나는 찟어 댔던가?
마치 총소리처럼 뻥뻥 울려대던 딱지치기...
이걸 하다가 손가락 끝에 피멍이 들지 않은 아이가 있다면 그 녀셕은 필시 동네를 휩쓸던 개구쟁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딱지치기를 하다보면 반드시 손가락 끝이 피멍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편의 딱지를 넘기기 위해서는 힘껏 내려쳐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힘껏 땅을 내려치는 수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대의 딱지가 넘어 간다면 이 정도의 아픔 쯤은 감수할 수 있는 법
아파트 단지내로 뻥뻥 울려 퍼지던 그 소리가 머리 속에 지금도 가득하다.
 
 세번째, 구슬치기      
구슬치기도 참으로 딱지 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다양한 놀이방식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홀짝, 공출넣기(땅에 구멍을 파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구슬을 잡고 구멍에다 넣어서 한바퀴 돌아오는 방식)을 돌, 눈깔빼기(흙 땅에다가 삼각형을 그려넣고 안에 구슬을 여러개 놓고 일정한 거리에서 던져서 구슬을 꺼내는 방식의 놀이), 맞추기(상대의 구슬을 맞추면 이기는 게임)등등이 기억에 떠오른다.
구슬치기를 자주하는 녀석들은 오야(대장의 일본말) 구슬을 하나 이상은 가지고 있다. 보통은 흰구슬이나 쇠구슬을 하거나 아니면 맨들맨들한 구슬을 시멘트 바닥에다 갈아서 표면을 거칠거칠하게 만들어 컨트롤 능력을 좋게 키운 구슬을 오야로 한다.
구슬은 잘 굴러가기 때문에 하수구 구멍에 잘 빠지게 된다. 그러면 그거 하나를 꺼내기 위해 막대기 끝에 다가 껌을 붙여서 꺼내던 기억이 삼삼하다.
 
 다섯 번째, 빼놓을 수 없다. 자치기!(토까이 놀이라고도 불렀던 것 같다)
나는 구슬실력은 고만고만한 정도였지만 자치기 실력만큼은 동네 수준급이었다.
땅에다 홈을 파놓고 나무 자대로 토까이(자에 맞아 나가는 조금만 나무)를 멀리 날리고 상대가 자를 던져서 맞추지 못하면 공격이 시작되는 게임이다. 만약 토까이를 보내는데 공중에서 잡게 되면 공격은 끝이 나고 상대에게 점수 포인트가 올라가게 된다. 두손으로 받으면 100점, 오른손으로 받으면 200점, 왼손으로 받으면 300점 이런 식으로... 만약 공격이 시작되면 토까이를 3번 쳐서 쳐낸다.(이때도 상대는 토까이를 받을 수 있다. 물론 받으면 공격은 끝이 나고 점수도 주게 된다.) 3번 쳐서 한번도 못치면 out이고, 실패없이 계속 맞는다면 언제까지고 거리를 늘릴 수있는 것이다. 거리를 멀리보내는 것이 이 게임의 관건이다. 마침내 3번을 다 사용하고 나면 흥정을 한다. 예를 들어 내가 500이라고 부른다면, 홈에서 거리 500자를 의미한다. 상대가 인정한다면 500점을 주는 것이고 만약 인정하지 못한다면 상대는 일일이 500자가 되는지 안되는지를 측정하게 된다.    
이 게임은 편을 갈라 여럿이 하는 게임으로 2000점이나 1000점 먼저 나면 이기는 게임이다.
아!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나무로 된 자로 토까이를 온 동네로 몰고다니던 기억이...  
 
여섯 번째,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어떠한가? 겨울철 만화주인공이 그려진 비닐로 덧씌워진 장갑을 끼고
누런 실이 감긴 얼레를 돌리고 연줄을 당기며 느끼던 손맛! 꼭 주낚하는 것처럼 연줄을 당겼다, 놓았다 했다.
그 시절 문방구에서 가오리연을 사면 습자지에 연살이 가로 세로 대나무로 덧대여 있는 걸 얼레에다 연결하여 연줄이 남아있는 최대한 높이높이 연을 날리던 기억과 몇몇 아이들과 연 싸움을 하던 기억, 그리고 연줄에 하얀 종이를 끼워 편지를 올려 보내던 기억들
사실 문방구에서 방패연 재료를 사서 날리기도 했지만 가오리연에 비해 만들기도 어렵고
설령, 방패연을 잘 만들어도 균형을 잡고 날리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기에 아이들은 쉽게 구할 수있고 가격도 싼,(아마 당시 50원 정도 했던 것 같다) 가오리연을 선호했었다.  
지금도 문방구서 가오리연 등을 파는 걸 목격했지만 재질은 습자지에서 비닐로 대처되었고 대나무 살도 수작업이 아닌 기계로 만들어 미끈한 것이 예전에 비해 정감이 덜갔다.
 
일곱 번째, 팽이돌리기(겨울 얼음위에서 돌리는 팽이치기하고는 구별된다)    
팽이돌리기 또한 뺄수 없는 놀이다.
문방구에서는 다양한 종류와 크기의 팽이를 팔았다. 뿔로 만들고 겉에는 알루미늄으로 도금을 한 뿔팽이가 있었고, 나무로 만들 것도 있었는데 보통 아이들은 나무로 만든 것을 선호했다.
팽이돌리기는 주로 겨울보다는 여름에 하던 놀이었다. 추운 겨울에 맨손으로 팽이를 돌리면 금새 손이 트고, 무엇보다 날씨가 추워서 맨손을 내기가 쉽지 않아서 여름철에 주로 했을 것이다.
 
나무 팽이를 문방구에서 사와서 줄을 감고 바로 돌리면 나무팽이는 금새 금이 가거나 깨지는 경우가 있어 팽이를 오줌에다 며칠동안 담궈 물을 먹인 다음에 돌렸었다. 그러면 팽이의 무게도 묵직해졌고, 팽이 박치기를 할때 쉽게 깨지지 않았다.
팽이놀이의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실을 팽이에 감고 힘껏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 팽이가 팽팽 돌아 간다.
여기서 몇가지 방법이 있는데,
먼저 오래 돌리기, 말 그대로 동시에 팽이를 돌려서 누가누가 오래 버티는지를 겨루는 게임,
그리고 팽이를 공중으로 던져서 손바닥으로 받아 돌리는 놀이가 있었고,
앞서도 말했지만 팽이 박치기, 자신의 팽이를 실로 밀어 상대 팽이를 쓰러뜨리는 게임,
팽이 줄타기, 팽이를 자신의 줄 위에 올려서 왔다 갔다 하는 놀이,
팽이 찍기, 상대의 팽이가 돌고 있으면 줄에 감긴 자신의 팽이를 아래로 내리 찍어 상대의 팽이를 넘기는 게임 등등이 기억난다.
 
여덟 번째, 명절 전후에 빠질 수 없던 화약놀이 
명절 전후한, 어스름 저녁이면 호약 터트리는 소리로 동네가 시끄러웠다.
화약놀이는 몇가지 종류가 있는데
먼저 화약총이다. 처음에는 단총이던 것이 시간이 지나며 6연발, 8연발 화약총까지 나왔었다. 동그랗게 연결된 빨간 플라스틱 화약탄들이 생각나는가?
그리고 화약 로케트, 화약을 장난감 로케트에다 집어 넣고 위로 높이 던진다. 그러면 만류인력에 의해 로케트의 머리부분이 땅에 쳐박히는 순간 폭발 하는데 그 소리가 제법 컸다.
그리고 콩알탄, 조그만 콩알처럼 생긴 하얀 화약이었다. 이걸 땅에 던지면 깜직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그래서 주로 개구쟁이 녀석들이 이 콩알탄을 가지고 여자아이들에게 장난을 쳤었다. 길가다가 바로 옆에서 터지면 정말 깜짝깜작 놀래는 화약이었다.
그리고 포범탄, 이는 빨간색갈을 주로 띄고 있었고, 아주 작은 다이너마이터를 연상하면 될것이다.
2~3 센티미터 정도의 길이에 심지가 매달려 있었는데, 여기에 불을 붙여 던진다. 다이너마이트처럼 심지가 다 타들어가면 펑하고 터지는 화약이었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화약놀이.
한번은 시골에 갔다가 밤중에 이 화약놀이를 하다가 동네 어르신에게 아주 혼난 적이 있다. 밤에 소가 놀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른즐은 이 화약놀이를 싫어 했지만 아이들은 무지무지 좋아 했던 화약 놀이!  
  
아홉번 째, 코카콜라가 홍보차 도입하여  팽이와 동반 자살한, 서양의 놀이 "요요"
이 팽이놀이는 아마 내가 국민학교 5학년에 코카콜라 회사에서 대대적으로 밀어붙힌 "요요"의 등장에 기세가 눌려버렸던 것 같다.
한때 팽이를 돌리던 아이들이 그해 여름,
코카콜라 회사의 직원들이 요요 홍보를 다니면서 좀 시들해 졌다. 요요는 그해 여름 정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 요요는 그 해 반짝 유행하다가 이내 시들해졌다.   
요요의 등장으로 예전에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요요와 비슷한 기구도 시들해졌다.
뭐냐하면 학교 앞 문방구에는 요철환 모양의 플라스틱에 작은 돌맹이를 담고 고무줄이 길다라게 연결되어 있는 놀이가 있었다. 이 고무줄을 손끝에 묶고 플라스틱 환을 친구들을 향해 던지면 다시 돌아오는 장난감이 있었다.    
 
 하여간 이 요요의 등장을 전후하여 전통놀이와 겨루고자 하는 다양한 상업적 놀이들이 나왔었다.
전통 뱀그림 주사위 놀이를 대체한 부르마블과 백만장자 게임,
길다한 장대 두개 위에 올라가 놀던 거꾸리 장다리  
혜성처럼 등장한 스카이 콩콩
바로 이 뒤를 이어 스카이 싱싱 등등의 좀 값나가는 장난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었다.
바야흐로 80년대의 경제발전으로 인해 어린이들의 전통놀이에 새로운 상업적 놀이들이 등장하게 되는 순간이 었다.    
 
         
 이제 겨우, 어린시절 기억에 남는 놀이 중 열가지 정도의 주요 놀이만 소개했다.  
그외에도 이런 놀이들이 있었다.
오징어 땅콩, 진놀이, 다스망구, 개뼈다구, 말 맞추기 놀이, 사방놀이, 색깔놀이, 돌깨기 놀이, 병깨기 놀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등등 끝도 없이 나오게 될 많은 놀이들이 내 어린 시절과 함께 했었다.
 
 하지만 또 이뿐이랴,
비가 오고 그친 날이면 하드(아이스바)꼬쟁이를 150개정도 주워서 나무 배를 만들어 웅덩이에 빼뛰우면서 놀고, 여름 방학이면 산으로 들로 쏘다니면서 옷에는 까만 깨같은 도둑가시를 군데군데 묻혀오던 기억들,
 
겨울이면 마산 장군동 그 하수구 도랑에서 얼음을 지치며 썰매를 타던 기억, 
또 불장난은 어떠한가? 만약 새로산 옷에 불똥이 튀어 땜방 자국이 나거나 머리를 고슬고슬 그슬려 오기도 하는 날이면 나는 엄마의 호된 잔소리에 진저리를 쳐야 했다. 하지만  저녁무렵 나가서 철둑길 근처에서 불을 놓고 감자를 굽기도 하고, 정 구워 먹을 것이 없다면 차돌을 구워 주머니 속에 넣고 따듯함을 오래도록 지니고 왔던 기억.. 그럼으로 겨울이면 내 손등은 늘 논바닥이나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졌지만.. 그래도 무지하게 재미있게 놀았던 나의 80년대. 그 어린시절!
 
 여름 방학이 한창 익어가는 날이면 밥 때는 어찌 그리 읽찍 찾아오는지, 엄마는 창문을 열고 크게 외친다. 
"창욱아! 밥 먹어라!"
엄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모른 척하며 놀던 그 시절..
엄마의 목소리에 악과 짜증까지 묻어나야만 마지못해 밥을 먹으로 들어갔던 어린시절..
 
 여름이면 산으로 들로, 
잠자리나 매미 메뚜기 나비 등등 각종 곤충을 잡던 시절,  빨간 플라스틱고무 물총에 물을 넣고 오전 내내 친구들과 물총 싸움을 했었고,
 겨울이면 동네 한구석에는 연탄화로를 놓고 '오릿떼기'(설탕을 쪽자에 넣고 달고나를 만들어 먹는 것으로 경상도에서는 오리떼기라 불렀는데 아마 오려 때기가 표준말에 가까울성 싶다.)나 꿀차를 팔았는데 그 주위에는 항상 아이들이 복작거렸었다. 돈이 없으면 집에 있는 쪽자로 설탕과 베이킹 파우다를 넣어 만들어 먹곤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커멓게 탄 쪽자를 보고난 엄마의 얼굴을 상상해보라...
엄마가 기분이 안좋을 땐 뒤지게 맞는 수도 있었으니, 집에서 쪽자에 오릿떼기를 하는 것은 여간 용기를 내지 않고서는 힘들었다.
 
 겨울철,  늘상 내 코에는 찔찔 코가 흘렀고 소매끝에는 흘러내리는 코를 하도 닦아서 코가 눌러 붙어 맨들맨들 해졌던 기억이 있던 국민학교.. 내 어린시절. 

 후레쉬 하나를 들고 한 무리의 아이들과 아파트 지하 배수구로 기어 들어가 거미줄과 오물을 뒤집어 쓰고 20분만에 반대쪽으로 기어 나왔던 추억들.(그걸 무려 5번씩이나 했었다.)
 
 또한 좁은 아파트 단지내에서 야구를 했던 기억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참고로 사촌이 야구선수였기때문에 글러브가 포수, 외야수, 왼손잡이 등등 무려 5개나 있었다. 동네 야구가 벌어지면 우리 형제가 없으면 야구가 안되었고... 그리고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나의 포지션은 늘 투수였다. 야구는 역시 투수가 최고 아니던가! 
 
 집 안에서 하던 놀이도 무척 많았다.
그 중에서도 손쉽게 할 수 있던 놀이가 발로 도둑잡기 놀이였는데,
이는 작은 종이에 검사, 판사, 형사, 도둑, 메뉴,(처벌메뉴를 말한다- 땅콩 고속도로 맥주, 침대, 등등의 벌칙이 적혀 있다,) 강도, 살인범 , 징역의 형량 등이 적혀 있는 종이 뿌린 다음 4장씩 나누어 갖고 범인을 지목해서 잡는 재미있는 놀이로 기억된다. 당신은 이 놀이를 어렴풋이 기억하싶니까? 
나와 당신은 추억이 1%라도 공유되어 있는 그런 사람인지요?  
 
 미처 기억에 나지 않아 이야기 할 수 없지만 그 외에도 무수하게 많은 놀이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러기에 늘상 재미있었고, 노는 것에 미쳐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여러분은 이중 어떤 놀이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여러 분의 어린 시절과 지금의 아이들을 비교해 보세요. 그 시절엔 넉넉하지 못했지만 놀이문화는 엄청나게 다양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넉넉하지만..
창 밖에서 신명나게 뛰어 놀 수 없는 아이들, 시간이 없는 아이들, 막상 아이들에게 시간이 주어 진다고 해도 뛰어놀 방식을 모르는 아이들.
내가 살았던 off-line의 80년대의 놀이 문화는 90년대로 2000년대로 전수되지 않았고.. 
아이들은 시간이 없고, 설령 시간이 있다하더라도 on-line 게임이나 닌텐도 게임, 혹은 어른 들의 상술이 빚어낸... 반드시 돈을 주고 사야만 하는 비싼 유캔도 카드에 익숙한 요즘의 아이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렇게 세상이 공평한 것일까요?
요즘 아이들은 많은 것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놀이 문화는 제대로 누리고 있지 못하더군요...
반면, 그다지 풍족하지 않았지만 반면 풍성한, 아니 끝도없이 스스로 창조해내던 놀이문화를 지녔었던 내 어린 80년대!!
과연, 저울질을 한다면 어느 쪽으로 무게가 기울게 될까요?
과연, 놀이 문화가 다양하지 못한 우리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해서
지금의 아이들이 80년대의 우리들 보다 건강한 것일까요?  
 
 정말 저는 제가 누렸던 우리놀이를 지금의 아이들도 누릴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처량한 발상을 해봅니다.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우리 놀이 살리게 살리게
 
 이상 창욱킴발리 제공이었습니다. 장시간 읽어 주세서 감사합니다. ^^
글을 읽고 한 분이라도 자신의 어린 추억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면..
저도 행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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