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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그을린 사랑

 

출연 루브나 아자발, 멜리사 데소르모-풀랭, 막심 고데트, 레미 기라드

 

 

 우리는 영화를 볼때 제목을 먼저 보고 그 영화가 어떠한 영화일 것이라는, 아주 단순하고 1차적인 선별과정을 거치게 된다. 대부분 영화는 제목을 보고 어떠한 류의 영화다 라는 짐작을 하기 마련이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제목이 주는 느낌데로 영화의 성격이나 깊이와 난이도가 예측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킹콩, 댄싱퀸, 부당거래, 미션임파서벌 등과 같은 제목의 영화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가끔은 제목만 보고서는 도무지 어떤 류의 영화인지 짐작조차 할수 없는 영화들이 있다.  

바로 이 영화 "그을린 사랑"처럼....

 

 '그을린 사랑'은 결말 자체를 보면 그야말로 충격적이며 기구한 한 가족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그냥 충격적인 사실로만 바라본다면 이 영화가 던져주는 문제의식은 재미꺼리가 아니라 관객을 괴롭히는 것에 불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그을린 사랑'은 단순히 충격적인 사실에 그치는 영화이거나, 기구한 사건이 던져주는 충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바로 '그을린 사랑'의 가치를 두고 싶은 것이다.

다시말해 이 영화를 보고난 후에 오는 외적 폭발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부적 2차 폭발이 시작되는 것이고, 이것은 다분히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충격이요, 1차적인 충격만큼이나 2차적, 내면적인 충격은 깊고, 그 1차적 충격으로 인한 문제의식이 가져오는 힘이 서려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점에서 이 영화를 주목하게 되었다.

 

 영화는 쌍둥이 자매가 죽은 엄마의 과거를 찾아가는 과정을 플레쉬 백과 현실을 넘나들어가며, 서서히 관객을 충격적인 결말로 몰아간다. 추리소설에서 보여지는 독자를 단숨에 흡입시키듯 한 쾌속성은 없지만....  하나 하나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추리소설과 같은 형식은 관객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영화의 중반부 정도가 되면 이 영화가 어떻게 펼쳐질것인가 하고 깊은 몰입을 이끌어 내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깊어지면 질수록 사건이 주는 충격도 점점 더 증폭이 되고 마침내 마지막에는 큰 폭발로 관객을 충격에 휩싸이게 하는 영화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보고 난 후 충격적인 결말에서 낯설고, 불편해 하기 보다는, 차라리 이 영화가 제공하는 2차적 재미에 푹빠져 들게되었다. 즉, 영화가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문제 제기에 주목하게되고, 이에 좀더 난이도 높은 퀴즈를 풀어내는 지적유희를 즐기면서, 내 나름의 흡족한 답안을 내놓았다는데 개인적으로 의미부여를 하게 된 것이다.

 

자, 그럼 내가 제시한 답안지를 여러분들께 보여드리겠다.

 

과연 이 영화를 통해 발견한 개인적인 지적,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충격은 무엇인가?

나는 '그을린 사랑'을 보고 불교적 시각으로 영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불교의 윤회사상과 '제법이 다 공하다'는 일체개공(一切皆空)으로 이 영화를 바라보았다.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은 죽은 어머니의 공증 유언으로 부터 출발한다.

쌍둥이의 아버지를 찾아 편지를 전하고, 또 쌍둥이 자매의 숨겨진 형(오빠)을 찾아 편지를 전하라는 유언인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유언에서 나체로 세상을 등진채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고, 아버지와 형(오빠)에게 편지를 전하기 전까지는 비석에 아무것도 쓰지 말하는 해궤망측한 유언인것이다.

영화는 주인공의 어머니가 이런 유언을 하게된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마침내 쌍둥이의 형과 아버지를 찾는 순간 우리는 다소 끔찍할 수도 있는 충격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쌍둥이의 어머니는 쌍둥이를 출산하기 훨씬 전에 형을 먼저 출산했고, 그를 고아원에 맡겨야만했다. 그리고 반드시 다시 되찾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 고향에 돌아왔을 때 끔찍한 사건을 격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변했다. 그녀의 기독교가 어떻게 이슬람교도를 살해하는지를 목격하게 되고,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기독교 지도자를 암살하고, 15년형을 받게 되어 독방에 갖히게 되고 거기서 상습적 성고문을 당하게 된다. 영화는 이런 스토리에서 끝을 내지 않고 바로 또다른 출발선을 긋는다.

 

과연 쌍둥이의 형은 어디있고, 쌍둥이의 아버지는 어디있는 것인가?

 

일체개공, 제법이 공하다...

만약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잃어버린 아들은 찾았는데... 그가 철천지 원수라면

그토록 사랑했고 만나고 싶던 대상이 바로 그토록 죽이고 싶었고, 마주하기도 싫을 정도로 미워했던 그 사람이라면..

어머니가 찾아 헤매던 대상.. 갈구하던 대상.. 사랑하던 대상은 그녀가 고아원에 맡긴, 그리고 그토록 만나고 싶고 미안해했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철천지 원수, 치욕을 안겨준 원수, 바로 감옥에서 그녀에게 성고문을 자행하던 인물이었고.. 그는 바로 평생 사랑할수도, 미워할 수도 없었던 두아이의 아버지인 것이다.

 

영화의 시작부분에 끝이없는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딜레마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쌍둥이들의 어머니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삼십년이 넘어 만난 아들이 바로 자신에게 성고문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끝없이 미움을 가져야 할 것인가? 아니 그럴수 없다. 그는 그가 그토록 그리워했고, 평생을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야했던 아들아닌가?

그럼 그렇게 만난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뉘우쳐야 하는 것인가? 아니 그럴수 없다. 그는 다름아닌 죽을 만큼 치욕적인 고통과 상처를 안겨준 고문기술자가 아닌던가?

그럼 쌍둥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버지이자, 형(오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어머니를 고통받게 만든 원수이자, 어머니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아들...이 같은 사람이다.

 

어머니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 것일까?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저주를 내려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원수(도저히 용서할수 없는 사람)= 죄책감(그리움)의 대상 (즉, 도저히 자신이 용서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아들)

 

의 공식이 성립된다. 결국 자신이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사람과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대상이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원수와 사랑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원수와 사랑하는 사람이 같다.. 이는 모순이다. 

여기에 종교적인 작은 깨닮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법이 모두 공한 것이다(일체개공)"라는 말의 참 의미를 알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고문기술자인 원수도 없고... 죄책감에 시달려야할 아들도 없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한 대상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내부적이고, 2차적인 충격이 일어나게되고 이 영화 그을린 사랑의 존재감이 크게 밀려드는 것이다. 이것이 그을린 사랑을 보며 내가 지적 철학적 희열에 빠질수 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그을린 사랑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플래쉬백 방식으로, 이 구분을 소제목으로 하여 각 소제목의 대상들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래서 조금 스토리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인상을 주는데...

나는 이런 소제목의 플래쉬백 방식의 불편함 마저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런 낮설고 매끄럽지 못해 좀 불편해보이는 전개가 오히려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소제목이 나오면 화면이 전환될 때 관객은 이것이 현재인지... 과거의 시점인지를 발견하기 위해 화면에 더욱더 집중력을 쏟아야 되고, 그 결과 관객은 영화의 흐름을 놓지지 않기 위해 화면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조용한 밤, 이러한 깊이있고, 마음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영화 한편 어떨까?

  

  꽃점 5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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