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화 섭렵기- saturday night fever 1.
초등학교 고학년(4, 5, 6학년)과 중학교 1, 2학년, 그 시절의 기억들이다.
토요일 아침, 조간 신문을 집에서 가장 빨리 펼쳐드는 사람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바로 나였다.
그렇다고 무슨 사회나 경제면에 실린 기사를 본 적은 한번도 없고, 바스락, 신문을 넘기면서 나는 이 소리가 멈추는 곳은 바로, 주말 TV 프로그램이 있던 문화면, 그 중에서도 밤 9시 30분의 시간 테이블로 제일 먼저 내 눈동자가 채널고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내 눈길이 머문 그 자리는 바로 MBC의 '주말의 명화'나 KBS2의 '토요명화' 혹은 그 옆에 일요일 TV 시간 테이블에 있는 일요일 밤 10시 30분쯤 KBS1 채널의 '명화극장'이었고, 여기서 영화 제목을 한번 살펴보고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다면 그 테이블 옆으로 간략하게 그 영화의 내용과 감독, 주연 등이 설명이 되어있는 기사를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시절 조간신문은 내게 있어 제법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도 그럴것이 TV 프로그램을 사전에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하고 매우 충실하며 착실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난 텔레비전을 너무 사랑했으니까...지금은 그를 사랑하다 못해 그 사랑에 중독되어 이젠 그놈을 미워하지만... 그래도 려전히 애증의 관계는 남아 있어 그를 가끔씩 대할 때면 예전 내 어린시절로 자꾸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어쨌든,
그 시절 나의 토요일 밤, 9시 30분은 이런 음악들로 시작을 했더랬다.
빰~ 빠라바라바밤~ 빰빰밤 빠-암빰 빠라바라 빰밤~밤! 밤! 빰! 빠~암 밤밤밤~ 으로 구슬프고 극적으로 시작하는 MBC '주말의 명화'의 시그널 음악인 영광의 탈출(exodus)의 주제음악이 흐르며 무수히 많은 영화들이 화면사이로 지나가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고,
밤빰빰빰~ 밤빰빰빰~~빠라밤 빠라바라바라 빠라밤~~ 으로 시작되었던 토요명화 로드리고(Rodrigo)의 아랑훼즈 협주곡이 선명하고,
빰빰 빠밤 빠라빠라바라~ 빰빰바밤~~ 바~~빰 하고 짧고 간결하게 끝났던 명화극장의 시그널 음악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타라의 테마 또한 기억 속에 또렷하다.
물론 방금 위에서 밤빰빰하고 음악에 맞추어 내 멋대로 음악을 소리냈지만 무슨 음악인지 종잡을 길이 없다고 말하는 분들은 잠시 이 글을 미뤄두고 음악을 찾아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러면 당장 여러분의 입에서는 "아! 이 노래!" 하는 말이 툭 튀어 나오려다가, 지금 이 글을 생각하고는 이 녀석이 시키는데로 할 수는 없지, 라고 "아! 이 노래!"라는 말을 차마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겠지만, 벌써 여러분의 머리 속에는 "아! 이 노래!"라는 문장이 흘러가 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분명 여러분들 중 몇명은 이 음악을 인터넷으로 뒤적여보는 사람들도 있다면 내 의도는 일단 성공인 것이다.
자, 자, 다시 그 시절, 그 주말의 밤으로 돌아가 보자!
그 시절 어쩌다 정말 보고싶은 영화라도 주말의 명화에서 하는 날이면, 이 시그널 음악들은 그야말로 짜릿짜릿 긴장을 자아내게 하면서, 내 안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를 실제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설이나 추석, 혹은 크리스마스나 연말이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소리소문으로만 무성하게 피어 올랐던 그런 영화들이 여기저기, MBC, KBS2, KBS1 TV 에서 무슨 속사포라도 쏘아대듯 동시간때에 방영을 해대는 것이었다.(스타워즈 시리즈나, 슈퍼맨 시리즈, 혹은 조스 정도면 정말 정말 대박인 영화말이다) 그런 날이면 나는 제법 행복한 갈등과 고민에 휩싸여야 했다.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석양의 무법자"를 봐야하나? 성룡, 홍금보, 원표가 주연한 "쾌찬차"를 봐야하나?의 무시무시한 갈등으로 인해 머리 속은 두 영화를 이리저리 점수 매기며 저울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석양의 무법자를 선택하고 나서도, 성룡의 '쾌찬차'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해서 유명한 홍콩 배우들이 주연급으로 세명씩이나 나오는 이런 영화는 상대적으로 '석양의 무법자'에 비해 재미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애써 믿어 버리는 것이었다. (사실 석양의 무법자도 클린트 이스트우드, 립반 클립, 엘리 윌러치 등 세명이 주연이었다...)
이런 대작들이 방영되는 날이면 텔레비전의 광고는 여느 주말보다 세배 네배 정도 광고편성이 늘어 났다. 시그널 음악과 함께 주말의 명화가 나오기 전서 부터 광고는 이미 15편 이상을 끌었고 본광고가 20편 이상 흘러가도 영화는 좀처럼 시작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정말, 당시엔 설이나 추석특집 영화가 시작하기 전 최소한 15분에서 20분 정도를 광고로 도배를 하는데... 요즘 같으면 박태환 선수의 올림픽 결승전이나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16강 진출을 겨루는 게임서 쉼없이 들어가는 중간 광고처럼 광고주들이 내보내고 싶어하는 골드타임이 아니었겠냐는 짐작을 해본다.
이런 광고들이 줄지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마치 똥이 엄청 급하게 마려워 화장실을 가려는데... 마침 철도 건널목을 건너려는차 땡땡땡 경고음이 울리며 철도 건널목에 안전바가 철컥 내려오고, 석탄을 실은 시커먼 화물열차 스무량이 덜컥거리며 내 앞에서 약을 올리기라도 하는듯 느릿느릿 기듯 지나가는 심정이랄까...
그 시간은 참말로 좀 쑤시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쥐어짜듯 몸을 비틀며 혼잣 말로 짜증을 냈던 기억도 몇 번있다. 하지만 이 또한 정말 보고 픈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주는 또 다른 즐거움 중에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KBS1에서 방송되는 명화극장은 이런 날에도 광고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KBS1은 광고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지금도 영화를 무척이나 즐기고 사랑하고는 있지만.. 왜 그 어린시절 유독 이렇게 주말의 명화나 토요명화를 집착하게 된 것일까? (나처럼 주말의명화나 토요명화에 환장한 놈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개인사로 출발을 해서 그 시대의 경제 상황과 맞물리게 된다.
사실 난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토요명화를 아주 가끔 봤었다. 아니 어쩔수 없이 보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시절 아이들이면 으레껏 9시가 되면 "어린이 여러분 이제는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라는 방송 멘트를 듣고 잠자리에 들어갔는데 나도 그 시대를 살아온 또래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9시가 되면 곧장 잠을 잤야했다.
그러나 예민한 성격의 나는 부모님이 형광등 불을 켜기라도 하면 잠을 자다가도 바로 인상을 지푸리며 다시 깼는데, 그런 날은 보통 아버지가 삼교대를 근무를 마치고 밤10시 경에 들어오시는 때였다.
더우기 토요일 밤이면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조용히 켜시고 볼륨을 낮추어 주말의 명화나 토요명화를 꼭 보셨고, 텔레비전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잠을 설치던 나는 언제부턴가 물끄러미 일어나 앉아 텔레비전 화면을 향해 넋을 놓고 있다가 흥미가 없으면 다시 잠을 청하고, 방송되고 있는 영화가 '서부영화'라는 걸 확인하는 날에는 밀려드는 졸음을 참아가며 영화 자막이 올라갈때까지 디 보고 잤다.
그러면 시간은 보통 11시 30분 경..
그렇게 보았던 영화들이 쟝고(프랑코 네로 주연의 정말 기억에 많이 남는 영화, 아직도 마지막 장면에서 쟝고가 "이 소리는 들리나?"라는 대사가 생생하다), 율브리너의 '황야의 7인', 서부의 7인, 테렌스 힐 주연의 튜니티 시리즈, 황야에 은화 1불, 게리쿠퍼의 '하이눈', 속 쟝고, 석약의 무법자, 황야의 무법자 등을 비롯해 그외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숫한 영화들이다.
그러면서 나는 웨스턴 무비에 서서히 물들어 갔고... 더 나아가서 헐리우드 영화의 맛을 조금씩 알아 가기 시작했다.
사실, 원형으로 테두리된 필름 안에서 사자가 포효하던 MGM 영화사, 파파레와 함께 현란한 조명들이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엔 영어로 선명하게 20 century fox라고 나오는 20세기 폭스사, 그리고 자유에 여신상을 모델로 한듯한 여자가 나와 횃불을 들고 있는 콜럼비아 영화사, 그리고 삼각산에 별표로 테두리를 그리며 등장하는 파라마운트사, 그리고 WB라고 이니셜을 세겨넣은 워너브로스사...들의 소위 헐리우드 7대 메이져사의 영화라면 무조건 다 믿을 만한 영화라고까지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바야흐로 헐리우드 영화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중학교 시절은 헐리우드와 홍콩(영웅본색, 천녀유혼, 천장지구, 도신, 첩혈쌍웅 등등)에 빠져 살았고 이후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을 지나오며 홍콩영화에 완전한 굿바이를 하고서야,(유덕화와 여러 배우들이 나왔던 용의 가족을 보고 홍콩과 외교단절을 선언했었다. - 이후 왕가위감독을 만나서 홍콩을 떠돌아다니기 전까지 외교단절) 비로소 유럽으로 비자 신청을 하고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독일, 핀란드, 폴란드, 소련등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다시 일본, 중국, 한국 홍콩 등의 아시아 비행기 티겟을 구입해서 여행을 다녔더랬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을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도 그걸 것이 우리네 부모님들은 한푼이라도 아껴서 잘살아야 된다는 생각이셨고, 또한 딱히 어린이가 볼수 있는 영화도 거의 상영을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슈퍼맨2를 보고왔다던가.. 어린이들은 볼수 없지만.. 가끔 부모님을 따라가 007시리즈를 보고 왔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는 시절이었다.
6학년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나무로 된 학교 마루바닥에 초칠을 하며 같은 반 친구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는데, 봄 방학에 중학생이던 누나나 형들을 따라 극장에서 인디에나 존스와 터미네이터를 보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텔레비젼에서 한참을 흘러 흘러간 주말의 명화 따위나 보고 있는 나로써는 그네들의 이야기가 충격이었고, 부러움이었고, 시기의 대상이었으며 또한 그네들이 보고온 영화들은 하나같이 걸작이요, 명작이요, SF대작이었다. 아! 나도 인디애나 존스 보고싶다. 터미네이터 보고 싶다!
그렇지만 내 마음데로 호락호락하게 그 영화들을 볼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언감생심 부모님께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꺼내고 지나갔다. 그 시절 극장을 가본 때가 언제였던가?
국민학교 저학년때 외삼촌을 따라 기억에서 희미해진 쿵푸영화 한편과 4학년 무렵이지 싶다..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아버지는 나를 극장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내일은 홈런왕"(OB베어스의 박철순, 윤동균, 김우열 선수들이 잠깐 등장하고 송재호씨가 아버지 역으로 출연한 어린이 야규영화, 당시 마산 강남극장으로 기억하는데... 달려라 달려 홈런이다~ 달려라 달려 지구 끝까지~라는 노래와 스토리 몇몇 대사들이 기억에 또렷하다)이 국민학교 시절 유일하게 극장에서 본 영화로 기억된다. 그외 영화는 모두 '토요일 밤 9시 30분'에 본 영화들이고.. 중학교에 가게 되어서야 비로소 영화 극장를 접해볼 기회가 생겼다. 당시 소풍을 읽찍 끝내고 나면 보통 단체관람 영화를 관람했었는데 1500원 정도로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중학생이 되면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가끔씩 있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영웅본색'이나 '다이하드'와 같은 영화들을 이본 동시상영 극장에서 보곤했었다.
그때부터 비로소 내 극장영화 전성시대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케빈코스트너가 감독과 주연을 한 "늑대와 춤을"인데...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에서 '늑대와의 춤을'이 골든 글로브상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영화가 상영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터였는데, 그해 아카데미 상도 휩쓰는 바람에 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는 관객들로 온통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극장 앞에 길게 줄을 서서 매표를 기다리던 모습을 찾아볼수 없게 되었지만... 당시엔 길게 꼬리를 늘어트린 줄을 만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 영화는 당시 마산 연흥극장에서 자리가 없어 많은 사람들이 선채로 보거나 불편한 바닥에서 신문지를 깔고 보았는데, 나 비좁은 2층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보았다.(지금은 이런 일을 상상할 수도 없지만 당시는 대박나는 영화들은 주말은 대부분 이런 풍경이었다) 그래도 정말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함보다는 감동이 더 크게 밀려왔고... 이후 주인공 존 던버의 인디언에 동화되어 가는 삶과 대자연에 묻혀 사는 삶을 꽤 오랫동안이나 동경해서... 결혼을 하기 전까지.. 언젠가 나도 저런 삶을 살겠노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아직도 이 영화의 장면들과 음악 그때의 그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그래서 DVD를 얼마전에 구입했다)
대자연의 풍광 속을 지나가는 인물들과 그것을 관통하는 장엄한 음악, 특히 주인공 존 던버가 인디언에게 점점 동화되어 가며 모닥불 주위를 돌며 나무창을 불속으로 던지던 그 장면에서 주인공 존 던버가 던진 나무 창은 불속이 아니라 내 가슴 속에 깊히 박혀 한 동안, 그 영화가 얼마나 위대한 지를 친구들에게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고등학교 시절 여전히 "주말의 명화"는 내 영화보기의 주력이었고, 여전히 극장을 자주 갈 형편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나서 내 문화생활의 혁신이 일어났다. 바로 집에서 비디오 플레이어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그것은 고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이 엄마에게 '이제는 EBS방송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녹화를 시켜서라도 보게 해야 성적이 오른다'라고 말을 꺼낸 다음 날 바로 우리 집에는 비디오 플레이어와 15인치 컬러 텔레비전을 새로 구입을 했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다른 용도로 아주 멋지게 비디오플레이어를 활용 잘하게 될지는 몰랐던 것이다)
영화에 푹 빠져지내던 나에게는... 비디오 플레이어에 비디오 테입을 찰칵 넣는 순간은 바로 신천지가 열리는 광경이요, 홍해가 갈라지는 듯한 장관이었으며, 가슴 속에는 또다른 세상을 만나는 두근거림이 분명 내 가슴팍에 존재했던 시간이었다.
이후 주말이면 모범생들이 꼬박꼬박 도서관으로 찾아들듯 나는 비디오 가게를 착실하게 출입을 했다. 그간 보고 싶지만 볼수 없었던 꽤나 유명하다는 영화들은 닥치는데로 섭렵했다. 한 비디오 가게로 영화사냥이 끝나고 나면, 집 주변에 또다른 비디오 가게로 옮겨다니며, 그 가게에 숨어 있는 괜찮은 사냥감들을 속속들이 뒤져 보았고, 또 그 가게에 사냥감이 없어지면 좀더 먼 비디오 대여점으로 원정을 다녔다.
그 열정으로 공부를 했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노는 것보다 공부가 더 좋아요~~ 가 아니라 공부보다 영화가 좋아요!를 떠들던 청소년이었다.
그렇게 초중고 시절은 극영화처럼~ 흘러흘러갔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좀더 극장을 자주 출입했고.... 본격적인 나의 세계영화기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 헐리우드를 넘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폴란드, 러시아, 스웨덴의 유럽과
홍콩을 넘어서 일본 중국 이란으로 비자를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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