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다투었다.
그날 바로 화해는 했지만 완전히 둘사이에서 풀리지 않은 뭔가가 있었던 그 다음 날...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내의 앨범을 꺼내왔다.
앨범 한켠에는 장인어른이 잘 정리해둔 아내의 학창시절의 성적표며, 졸업장 뿐만아니라 각종 미술대회에 나가 탄 상장이며, 성적우수 상장들도 눈에 띈다. 아내의 학창시절 성적이며 상장들을 훔쳐보고는 괜실히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그것들을 잘 정리해두고는 앨범의 첫장을 펼친다.
아내의 웃는 얼굴..
방실방실 마냥 행복하기만 아내의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이 한장한장 넘어갈 때마다
내 입가에도 덩달아 웃음 무더기가 척척 넘어간다.
내가 앨범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피식거리기도 하고 킥킥거리기도 하자, 아내는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내 옆으로 앉더니 보고 있던 앰범을 자기 쪽으로 냉큼 끌어 당긴다. 그렇게
사진을 보는 아내의 두눈은 이내 싱그러운 추억 속으로 젖어들고, 무표정하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고여든다.
지금 그녀의 웃음 속에 그녀만의 고유한 세월이 한가득 들어 앉아있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낯익은 소녀와 바로 내 옆 앉아 조용히 웃고 있는 아내 얼굴을 오버 랩시켜보면서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조금의 아쉬움과 약간의 쓸쓸함이 몽글몽글 피어 오르는게 느껴진다.
아내가 그녀의 추억을 진득하게 이루만지는 동안,
나는 내 추억의 단편들을 챙겨와서는 기억의 편린과 광택이 사라져가는 사진들 사이의 간극을 익숙하게 기워낸다. 그리고 다시 입가에 웃음이 빙그르 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웃음이 한창인 가운데..
우리들 각자의 추억이 그득한 앨범은 어느 일정 세월을 걷어내자...
아내와 나의 기억들은 이제 서로 같은 추억으로 숨을 쉬기 시작한다.
아내의 사랑스런 어깨 위에 다정하게 얹힌 내 손은 전국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진해 군항제의 벚꽃이 화사한 벤치와 지리산 대원사의 생경스러운 안내판 앞에서, 영주 부석사의 가파른 계단과 탄탄한 돌탑들이 주인인 듯한 지리산 삼성궁을 배경으로, 지리산 쌍계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펜션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 앞에서, 부산 해운대의 파란 하늘아래에서..
아내와 나는 온전히 각자의 추억만을 가진 사람처럼 짐짓 모른 척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두사람의 추억의 회고전은 어느 일정시점을 지나면서부터 같은 장소와 시간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마치 나란히 달려오던 두 철길이 서서히 서로에게 다가와 결국 하나로 겹쳐서 달려나가는 것 처럼.
그 시점부터 더 이상 각자 앨범에 들어있던 똑같은 사진 중 한 장은 더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우리는 함께, 서로, 혹은 공동의 세월을 살아왔다.
그리고 한권의 또 다른 앨범을 펼쳤을 때,
그곳에는 나와 너가 아닌 우리가 되어 있었고, 또 몇장을 더 넘기자
부부가 아닌 가족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우리가 행복하게 웃고 있다.
사랑스러운 갓난아기가 목욕을 하며 활짝 웃고 있더니, 앨범 속에서 조금씩 귀여운 아이가 자라더니,
어느새 아이는 샛노란 유치원복을 입은채 방실거리고 있었고,
그 다음 사진 속에서 아이는 코믹스런 표정으로 웃고 있고, 아이의 사랑스런 조막 손은 태어난지 2주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기(둘째)의 앙증맞은 발을 조심스럽게 치켜세우고 있다.
계속해서 사진 속 아이들의 표정은 모두 행복했고, 그 속에선 아내와 나, 역시 덩달아 행복한 표정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와 너에서 우리로,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알게 모르게, 서로를 의지해 살아온 시간을 찬찬히 내려다보는 부부의 표정 또한 행복이 가득한 것이다.
그날 밤,
아내와 나는
그렇게..
아무 말없이 풀어졌고..
나는..
미처 인화하지 못한 채 컴퓨터에 잠자고 있을 소중한 사진들을 맡겨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했다.
6월이 다 지나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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