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조용조용 크리스마스 연휴를 가족과 보내고 있는 중이었어. 방으로 들어가 책을 펼쳐 볼까 하는 찰나,
문득 형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정말 오랜만이었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며칠 전, 휴대전화 액정에 형의 이름과 함께 벨이 울렸을 때의 반갑던 마음과 약간의 놀람이 또렷하게 떠올라.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형의 나즈막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는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
형의 그 편안한 목소리는 그것을 넘어 성품마저 부드럽고 편안한 사람임을 짐작하게 하는데 어쩌면 그건 형의 부모님으로 부터 물려받은 천성이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보게 돼.
그날 몹시도 바쁜 일과가 거의 끝나가려고 하는 무렵, 전화기 너머로 전해오는 형의 편안한 음성에서 형의 얼굴을 떠올렸어. 작지만 가늘고 길게 뻗어 있는 형의 부드러운 눈매가 가장 먼저 머릿 속을 스쳐가더라. 그리고 형의 입매와 귀 모양도 이내 떠올랐어. 그러자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돌고 내 목소리에 생기가 돌게 되더라구.
때마침 내자리를 지나가는 입사동기 녀석이 내 통화를 엿듣고 누구냐고 묻기에 형과 나의 그간 스토리를 들려주었더니 아직도 군대 고참하고 연락을 하고 지내냐면서 꽤나 신기해 하더라구.
나이를 먹어 가면 갈수록 새로운 사람과 제법 심도있는 관계를 맺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형도 알잖아. 사실 새로운 관계 맺음이 아니라 기존의 관계들을 발전은 고사하고 유지시키는 것 조차도 쉽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는 요즘이야. 그건 아마 모두가 생계를 위해 공사다망하기 때문일 것이란 짐작을 해보게 돼.
아마도 이제는 생계유지를 위한 밥벌이를 제외하면 각자의 삶의 관심과 철학, 가치관이 다르고, 예전처럼 그 다름을 굳이 주장하고 설득하는 것 조차도 피곤하고, 또 다들 밥벌이에 바쁜 마음이라 도무지 다른 생각들을 들일 여유가 없어진 것 때문이겠다 라고 나름 짐작해 보게 돼.
적어도 내 스스로에 비추어 보자면 위의 추측이 상당히 맞는 것 같아.
그런데,
형과는 최근 몇년 동안 얼굴 한번 보지 못했지만 아직까지 서로가 느끼는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해보면 좀 신기하기도 해. 딱히 설명할 길은 없지만 뭐 형과 나의 이런 관계가 참 좋고, 편하고 그래.
딱히 호들갑 떨며 만나자 어쩌자 하지 않아도 나름 좋은 것 같아. 물론 전화로 연락이 닿을 때마다 아쉬움은 여전하지만 말이야.
아마도 옛날 우리 조상들이 자주 볼 수 없는 벗에게 느끼는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봐.
자주 볼수 없고 서로의 연락도 인편이나 편지로 밖에 할 수 없었던 그때는 벗을 향한 그리움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 비해 훨씬 더 했을 거라는 생각이 딱히 틀리지는 않을 것 같아.
형!
일년에 한 두번, 어쩌다 생각이 날 때, 연락하게 되는 날이 대부분 세모(歲暮)에 주고 받는 통화가 자주 있어 더 그런지 몰라도
이번에도 형의 음성을 듣는 순간 반가움과 동시에 또 한해가 저물고 있고, 다시 한꺼풀의 세월은 어김없이 덧씌어 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
형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형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그리움의 감정이 눈송이처럼 폴폴 피어나고,
가족과 친구와는 또다른, 그러니까... 마치 어린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버린 친한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휴대전화로 전해오는 형의 음성을 듣고 있노라면 불쑥 솟구치는 반가움에 흥분되지만
한편으로는 따듯함과 편안함이 깃들어 있어 매번 참 좋은 것 같아.
언제가 정말 형과 함께 조용하고 고급스런 술집에서 종종거리는 대화를 두어 시간 나누고서, 또 만날 날을 기약하는 모습 떠올리면 어쩐지 따듯하고 편안한 기분이 가만가만 스며들어.
형!
지금처럼 형이 내년에도 편안하고 따듯한 목소리로 남았으면 해.
그러니까 건강하자는 말이고
그러니까 보고싶다는 말이고
그러니까 운이 좋아 내년에는 술잔을 부딪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2020년 12월 26일
28사단 80연대 2대대 8중대 90미리 소대
예비역 병장 정창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