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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도 나를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논어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익숙한 구절로 해석하자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이 구절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공자님의 말씀 가운데 으뜸으로 여겨지는 글귀로

참으로 번쩍이며 명쾌하게 뇌리를 파고들어 전광석화(電光石火)라는 사자성어가 딱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문구를 역으로 틀어, 무지(無知)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아래와 같은 문장이 될 것이다.  

 

 "무지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야 말로 진정 모르는 것이다."

 

공자의 앎에 대한 정의를 뒤집어서 모른다, 즉 무지에 대한 개념정리를 위의 문장으로 해보면

모른다, 혹은 알지 못한다는 개념이 좀더 명확해지는 듯하다.

 

 우리는(나를 포함한) '어떠한 사건이나 이치에 대해 사실 정말 무지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잘 모르고 있지만 안다고 착각하고, 또 스스로 모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까맣게 모르는, 절대 무지에 빠져있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가 안다라고 믿고 있거나, 옳다고,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상황이 바뀌면서 가치관이나 지식, 혹은 팩트가 쉽게 변하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중세의 천동설, 조선 유교의 어마 무시한 허례허식, 기독교 창조론, 대서양을 건너면 인도가 나온다고 믿었던 콜럼버스가 엉뚱하게 발견한 신대륙에는 금과 은이 그득하다는 엉뚱한 믿음 등은 모두 틀린 것이었고, 분명 이러저러한 합리적인 이유로 주가가 오를 것이라 확신한 주식은 여지없이 우리를 배반하고 마는 것이다.  

특히 어떤 특정인이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인 면모로 보나 제법 훌륭하다고, 능히 믿고 본받을 만하다고 여기고 존경의 마음을 보내다가도 이런 믿음이 한순간에 박살이 나는 경우는 요즘에도 자주 눈에 띄는 풍경이다.   

 

사실 이것은 사건이나 이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할 때, 타자에 대한 무지(상대를 모르는데 안다고 생각하거나, 모르는 것을 모르고 있을 때)의 정도는 더욱 깊고 클 것이라는 짐작 해보게 된다.  

 

 성인이 된 후, 세월과 세파의 타래를 수없이 감아돌고 나면, 사람들은 제법 익숙하게 그만의 방식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규정지으려는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물론 섣불리 타인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분명 말을 하지만 사실, 즉흥적으로, 느낌과 경험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즉, 누구누구는 이러한 사람이며 이러 이러한 성격이다,라고 쉽게 이야기하고

또 이런 타자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은 확증편향(確證偏向)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제법 잘 맞아떨어지는 듯 여겨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스스로의 회로에 집어넣고 짐작과 느낌으로 타인을 규정짓는 습성을 자연스레 익힌 것처럼 보인다.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런 경향은 또렷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쉽게 말을 할지도 모른다.

 "저런 류의 사람은 내가 잘 알지... 저런 사람들은 보통 이렇지..."      

과연, 우리는 타자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일까?

 

 "A씨는 어떤 사람입니까?"

 누군가가  잘 모르거나 그렇게 가깝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위의 질문을 던진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대답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이나, 매일 부딪히게 되는 사람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어떨까?

아마도 타인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이야기해줄 것이다. 보통은 질문을 하면 뭐라도 알고 있는 것을 대답하기 마련이니까.

 

 "내가 보기에 A씨는 조금 활달하고 약간은 감성적이며 즉흥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돈에 대해서는 확실한 사람이에요."

 뭐.. 이런 식으로 답을 해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타인에 대한 판단은 정말 그러할까?

앞서도 말했지만 다른 사람이 판단할 때도 어쩌면 A씨는 활달하며 감성적이고 즉흥적이며 돈에 대해 철저한 사람일 거락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A씨는 이런 성향으로 규정지어질 수 있는 사람일까?

 

 잠깐 시간을 내어 A씨를 좀 더 자세히 보기로 하자.

 A는 직장에서는 나름 활달하게 행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집으로 들어가면 한마디도 하지 않고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며 내면으로 침잠하는 인물에 가깝다. 그의 아내는 가끔 그를 보며 말을 하지 않으니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며 답답해한다. 또 감성적인 면이 많아 그가 최근에 꽂힌 음악을 몇십 번씩 반복해서 듣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반적인 그의 행동양식이 전부 그렇지는 않아서, 일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논리적이며 합리성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또한 돈에 대해 철저함을 표방하고 있어 함부로 지출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가 평상시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계산적이지도 않아 무심하고 즉흥적으로 약간 낭비로 비춰질 만큼 돈을 지출하고 있는 편이다. 며칠 전에 서울에서 있었던 뮤지컬 공연에 그는 가장 좋은 좌석을 예약하고는 아이와 아내와 함께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식사로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송아지 스테이크를 기분 좋게 먹은 것을 보면 돈을 주판을 튕기듯 계산을 하지는 않는 타입인 듯 보인다. 또 절대로 타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지만 매달 결손가정에 5만원씩 송금을 보내는 일을 10년간 해왔으며, 얼마 전에는 직장에서 있었던 '사랑이 도시락의 보내기 행사'에 며칠 전에 받은 성과급 중 200만원을 기탁해 직장동료들을 놀라게 한 인물이다.

 

 이처럼 우리는 타인을 아무렇지 않게 평하지만 사실 타인과 평생을 온종일 지내보지 않고는 그의 상당 부분을 잘 알기란 어려운 것이다. 하물며 그를 낳은 어머니도, 그와 함께 20년을 넘게 지내고 있는 아내조차도, 속속들이 한 사람에 대해 알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앉아 내가 아는 지인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 대해 마치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의 주장처럼 알 수 없음, 또는 모름의 상태가 맞다고, 나는 그들을 잘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막상 직접 그들을 마주하고 보면, 내 앞의 상대를 제법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제법 오랜 기간을 그와 함께 하였고, 그와 어린 시절부터 부대껴 왔으니까, 상대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는 종종 상대를 나름으로 판단하고, 나름으로 평가하고 있다. 누군가 물어오면 답을 하고 무의식적으로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를 유추하고 느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판단과 느낌은 자세히 살펴보면 무지의 소산으로 상당 부분이 오류 투성인 경우가 많고, 또 어쩌다 맞는 경우에는 우리의 뇌 속에 도식화된 판단은 더 확실해져서 확증 편향성으로 자리 잡게 되어, 차후 더 큰 판단 오류를 범하게 경우가 많으며, 이런 생각들이 강화되고 굳어질 때 소위 '꼰대'로 불리게 되는 것이리라.

 

 사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내가 알고 있는 기존의 이치(理致)는 평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타인처럼 너무나 지엽적이며 단편적인 사실에 기초하거나 가변적인 이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어쩌면, 어떤 대상이나 사람에 대해 1도 모르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래는 며칠 전에 읽은 최은미의 소설 "보내는 이"의 한 구절이다.

 

「집으로 택배 상자가 하나 배달된 건 은행잎들이 막 노랗게 익기 시작하던 9월 말경이었다. 상자 속엔 스프레이형 소화기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들어 있었다.  보내는 사람 이름이 '김진아'가 아니라 '김지나'인 걸 보고 처음엔 잘못 쓴 거라고 생각했다. 택배 송장을 뜯어 냉장고에 붙여 두고 이틀이 지난 뒤에야 나는 SNS를 하지 않는 진아 씨의 SNS 계정들을 찾기 시작했고, 진아 씨의 이름이 '지나'인 것을 알게 되었다.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진아씨의 이름을 잘못 불러왔던 것이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진아 씨는 내가 자신의 이름을 잘못 알고 있는 걸 몰랐단 말인가? 메세지에도 수시로 진아씨라고 썼기 때문에 몰랐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왜 내 이름은 지나라고 말하지 않은 걸까. 나를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은 걸까?」 

 

 주부인 주인공 영지는 8년을 잘 지내온 진아 씨가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고, 그녀로 부터 소포를 받게 되는데,

8년을 지내며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택배송장에 쓰여진 그녀의 이름을 보고서야 '진아'가 아니라 '지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이 8년간 일방적으로 생각했던 이름이 잘못 알았던 것처럼 어쩌면 타인에 대해 아주 사소한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스스럼없이 판단하고 평가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세월을 여러 번 휘감고 나면 우리는 상대를 대략 파악할 수도, 타인에 대한 판단이 얼추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타인에 대한 대략적인 성격을 파악한 것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게 되는 그 순간이 상대를 알게 되는 것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지점일 지도 모른다. 부분만을 보고 한 사람의 전체를 단정적으로 판단하고

타자에 대한 자신의 가정이나 추론이 맞다고 확인이 될 때 우리의 확증편향은 더 강화되고 확산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확신하는 장님들의 코끼리 만지기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설령 타자에 대한 자신의 판단 몇 가지가 맞아떨어졌고, 그것이 그 사람의 대표성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상대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타자와 자신과의 차이와 동질성에, 혹은 자기의 마음에 들고, 안들고에 집착하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주 넓고 큰 의미의 이익과 손실, 즉 심리적 경제적 득실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의 생각이나 행동이 내게 편하고 내가 원하는 것, 혹은 득이 되는 것일 때에는 타자가 마음에 들 것이고, 또한 서로의 생각이나 성격이 비슷하거나 같음에 기뻐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불편하고 원하지 않는 것일 때는 상대와 거리를 두거나 나아가서 마음속으로 배척하게 되는 것이리라.

손해, 불편, 이익 등이 무의식에 개입함으로써 어쩔 수없이 우리는 타인을 판단하는 데 있어 일방적이며 도식화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글머리에서 언급했었던 문장으로 돌아가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또한 모르고 있음을 가만히 자각하자.  

 

우리가 타자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타자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또한 타자에 대해

다름을 인정하고, 나와 잘 맞지 않음을 인정하고,

감정을 절제하고, 상대를 들여다보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도록 노력해 보자.

마치 바다를 바라보고, 산을 바라보고, 새와 나무를 바라보듯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간섭하거나 판단하려는 정도가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또한 노력하자. 때로는 부모를, 아내를, 자녀를, 친구를,

오늘 하루만은 들여다보려 하지말고, 그저 바라보도록 해보자.

마치 바다를 바라보고, 산을 바라보고,

새와 나무를 바라보듯

부모를, 아내를, 자녀를, 친구를,

 

그러면 오늘 저녁, 어쩌면

그들이 꽃을 보듯, 나비를 보듯, 고양이를 보듯,

가만히 나를 바라봐 줄지도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 또한 나를 모른다.

내가 당신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이 사실이

그렇게 서글픈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고개 들어 당신을 바라볼 때   

앞산처럼

당신은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도

당신과 나는

스스로 그러한,

自然의 일부로 남겨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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