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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맛을 알면 인생은 가을이 되고

 누군가 가을을 말해 보라고 하면 산이라고 답할 테다.
물론 윗 문장에서 가을이라는 단어를 봄이나 여름, 겨울로 고쳐 써도 산이라는 대답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산은 언제나 그 계절의 옷을 차려입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산이 입고 있는 대표 브랜드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가을'이라는 브랜드를 고를 것이다. 적어도 내겐 가을이라고 하면 산이 떠오르고, 산이란 모름지기 가을산이니까.

 페이스북의 유용한 기능 중 하나는 과거 올려둔 사진이나 기록들을 매해 같은 날이 돌아오면 다시 게시해준다는 점이다. 덕분에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추억들이 잠시 불꽃놀이를 하듯 머릿속에서 반짝 맴돌게 되는데, 이 기분이 제법 달짝지근하다.

 몇 해 전 오늘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온다. 중년이 된 지금, 뭉텅뭉텅 사라져 가는 기억들을 이렇게나마 페이스북을 통해 더듬거릴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본다. 틈틈이 일상의 사진이나 그때그때 드는 생각들을 페이스북에다 올리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9월 중순부터 시작해 10월 말까지 페이스북 계정에서 피드백되는 사진들을 보면 대부분 산과 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해마다 이 시기가 되면 등산이나 트레킹을 자주 다녔다는 말이 된다.
 올해도 별반 다르지 않아 9월 둘째 주부터 시작해서 주말마다 크고 작은 산들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지리산, 남산제일봉, 황석산, 가지산을, 친구들 혹은 회사 동료, 때로는 아들과, 그도 아니면 혼자서라도 이산 저산 쏘다니고 있다. 내게는 바로 이맘때가 등산 시즌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찬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들고 은행이 노랗게 익어가는 시기부터 온 산자락이 단풍으로 붉게 물드는 때까지가 한국에서 등산하기 가장 좋은 절정의 시간이라고 믿고 있다.
하여, 이 황금시즌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기에 주말 아침이면 배낭을 챙겨 매고 바지런히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가 지나버리면 산기슭에 하얀 눈이 차곡차곡 쌓이는 한 겨울이 되기 전까지는 등산은 왠지 시들해지고 만다.

 

 산은 혼자도, 아들과 둘이 올라가도 좋지만 무엇보다 친구들과 함께 할 때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된다. 친구들과 있는 동안은 본연의 내가, 그러니까 여느 때는 심연에서 모래를 뒤집어쓴 채 움츠려있던 꾸미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 완전 자동으로 급팽창하며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친구들 앞에서 만큼은 사회적 지위와 체면? 따위는 훌러덩 벗어던지고 원초적인 내 모습으로 돌변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진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그저 순간을 탐닉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사회적 지위와 체면 따위는 별로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나이가 들다 보니 이런 걸 깡그리 무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친구라는 단어를 붙들고 힘껏 쥐어짠다면 마지막엔 어린 시절 얼굴들 몇몇이 장난스럽게 팔랑거리며 나부끼고 있는 뜬금없는 상상을 해본다.

 어느 해 봄, 친구들과 마카오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어쩌다 한 친구가 적극적으로 여행을 주도했는데, 금요일 저녁 비행기로 떠나 월요일 아침에 도착하는 꽤나 빡빡한 여정이었다. 친구들과의 첫 해외여행인지라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여행을 며칠 남겨두고부터는 속에서 짜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친구들을 싸잡아 욕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당시 지점장이었던 나는 막중한 책임감을 휘휘 감고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는데, 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해외여행을 갈만한 마음의 여유가 한 움큼도 없었던 것이다.
 여행 당일 퇴근시간이 되자 마음을 졸이며 조용하고도 재빠르게 회사를 빠져나왔다. 홀로 공항으로 운전하는 내내 투덜대고 구시렁대며 친구들을 욕했던 것 같다.
 ‘친구 놈은 하고많은 날 중에 왜 하필 이렇게 바쁜 시기를 택한 걸까. 이 기분으로 여행을 가봐야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이런 상태로 여행을 하느니 차라리 안 가고 말지.’
 당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푸념과 분풀이를 애먼 친구에게 마구 쏟아내며 공항으로 들어섰다. 이성은 모두 사라지고 짜증만 가득 들어찬 야수 한 마리가 내 안에서 울부짖는 듯했고 그런 상태로 친구들을 마주하기가 껄끄러웠다. 하지만 항공권 등의 경비는 이미 지불을 한터라 어쩔 수 없이 주뼛주뼛 공항 출국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저편에서 나를 향해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대는 친구들을 보는 순간 쉴 새 없이 독기를 뿜어대던 고약하고 못된 야수는 순식간에 증발해버렸고, 해맑은 소년처럼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게 아닌가.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대체로 어떤 대상(사물, 식물, 동물, 사람 등)과 함께 한 시간이 오랠수록 익숙함이나 정이 차곡차곡 쌓인다. 그러면서 굳이 상대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친구들과는 편안함을 넘어 만만함으로까지 이어지는데 어떤 때는 겁 없이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기도 한다.
 아마도 허물없는 편안한 기분이 극대화되면서 그 순간을 서로 순수하게 즐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이 세상 누구와 이토록 편안하면서도 만만한 관계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직장동료? 부모나 자녀? 음... 쉽지 않다. 심지어 아내와도 이런 식의 만만한 관계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런 대상은 친구들밖에 없지 않을까.

 술을 잘 마시지도 좋아하지도 않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술을 즐기게 되었다. 이걸 생각하면 꽤 기분이 좋아진다. 어쩐지 술을 즐기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생의 맛을 알고 있는 그럴싸한 어른이 된 것만 같고, 제법 근사하게 늙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믿음마저 생기는 것이다.

 술은 혼자도 마시고, 아내와도 혹은 직장동료와 마시기도 하지만 역시 으뜸은 친구와 마시는 술이 분명하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것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되어가고 있다.

 몇 해 전부터 '한 달에 한번'이라는 이름으로 단톡방을 만들어 친구들과 등산을 도모하고, 등산을 마친 후에는 술 한잔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정상에서 막걸리에 김치와 두부를 나누어 먹기도 하고, 하산길에는 주점에 들러 백숙이나 파전, 도토리묵, 오리고기 따위의 안주를 시키고 시원하게 쏘맥을 두어 잔 말아먹고 난 뒤,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지며 서로 낄낄대기도 한다.

 몇 달 전에는 등산 전날부터 양꼬치 생각이 간절하여 하산 길에 칭다오에 양꼬치를 먹고, 공부가주에 꿔바로우를 먹고 *알딸태 상태가 되었다. 이 알딸태 상태가 되면 미소를 띤 얼굴인 채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강한 확신이 든다.

 여기서 '알딸태'가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으신다면,

에헴, 파스타 면을 삶을 때 적당히 덜 익힌 '알덴테' 상태로 익혀야 하는데, 이에 빗대어 적당히 술 먹고 알딸딸하게 기분 좋은 상태를 일컫는 말로 '난척 선생님님'께서 만들어 낸 멋진 말이라고 대답하고는 근엄한 표정으로 마무리를 하겠다.

 지난달은 합천 남산제일봉에서 안동소주와 족발을 먹었다.

소주 한잔을 비운 후에 입맛을 다시며 족발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는데 느닷없이 말벌이 등장하더니 차례 놓은 음식 위를 붕붕 맴도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기겁을 하고는 즉시 자리를 피했다가 말벌이 사라지자 다시 돌아왔는데, 다시 자리를 잡자 놈도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주위를 요리조리 맴돌며 족발에 앉았다가, 쌈장에 앉았다가, 술잔에 앉았다를 반복하면서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급한 대로 손을 휘저어 쫓아냈지만 이내 우리 곁을 맴돌며 몹시 성가시게 하는 것 아닌가. 독한 안동소주가 두어 잔 들어가자, 사뭇 호기롭게 변한 내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놈을 째려보다가 독립선언이라도 하듯이 친구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한 번만 더, 이 말벌 새끼가 우리를 귀찮게 하면 내가 밟아서 죽이고 만다."
이 말을 듣더니 친구들은 제발 그래라며 낄낄 웃어댔다.
아니나 다를까 이 놈은 다시 나타났고, 바위 위에 붙어서 꼼지락거리다가 잠시 움직이지 않는 말벌을 보고는 조용히 일어서서는 세상의 몹쓸 악을 처단한다는 마음으로 발로 말벌을 무참하게 짓이겼다. 잠시 뒤 말벌의 최후를 확인하려 조심스럽게 발을 들었다. 하지만 좁은 홈에서 멀쩡하게 견디고 있던 말벌은 발을 뗌과 동시에 앙갚음을 하려는 듯 붕 하고 날아올라 우리를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또다시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총알처럼 튕기듯 달아났다. 그러면서도 그 상황이 너무 웃긴 나머지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며 연신 낄낄거리며 한참 동안 웃어댔다. 다행히 말벌에게 쏘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야에서 말벌이 완전히 사라지자 한 친구가 암살에 실패한 나를 향해 ‘하마터면 너 때문에 벌에 쏘여 응급실에 갈 뻔했다’고 면박하며 다시 낄낄거렸다. 그리고는 또다시 자리에 앉아 족발을 먹는데, 여지없이 말벌이 등장했고, 주변을 휘리릭 날아다가 이번엔 등산용 컵을 담는 통 안으로 쏙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있어 바라이. 인마 이거 이거, 이제 내한테 죽었다." 그걸 본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하며 뚜껑을 잽싸게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바텐더라도 된 듯이 몸과 컵 통을 요란하게 흔들어 댔다. 쉐이킷 쉐이킷.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정말 배꼽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복부를 부여잡고 한참을 큰소리로 웃어댔다.

생각해보니 최근 몇 년 동안 그렇게 아이처럼 깔깔거리며 오래오래 웃어 본 기억이 없었다.

아, 말벌은 어떻게 됐냐구요? 그놈의 최후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는 걸로.

 몇 주 전 일이다.

함께 등산을 다니던 친구 하나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오른팔에 금이 갔고 결국 깁스까지 해야 했다. 직업이 치과의사인 친구는 오른손잡이 인지라 한 달 동안 일을 못하게 되었다.
쉰이라는 나이나, 가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라는 무게를 따져보아도, 여러모로 친구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걱정과 동시에 이기적인 마음 하나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친구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은 맑고 푸른 이 가을, 등산하기에 더없이 좋은 이 가을, 함께 산을 오르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아쉬움이었고, 당분간 그 친구와 술 마시며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대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아쉬움이었다.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도, 내 이기적인 아쉬운 마음도 모두 다 진심인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친구 사이에 영양가 있는 대화라 함은 모름지기 서로에게 진지하고 진중하며, 내면의 진실된 것들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시시껄렁하고, 약간의 모자람이나 치부를 살짝 드러내고, 철딱서니 없고, 별반 영양가 없는 말들을 섞고 나누고 하는 것이 좀 더 진짜배기 대화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힘 쫙 빼고, 내려놓고, 눈치 볼 것 없이 그렇게 수다 떨듯 말을 섞고 오는 대상이 바로 내 앞에 있는 친구라는 생각이다.

 나이가 드니 친구의 소중함이란 예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친구라는 대상이 주는 의미는 차 안이나 식탁 한편에 두고서 생각날 때마다 주저 없이 꺼내먹는 캔디처럼, 고급스럽진 않아도 그저 만만하고 고만고만한 달달한 존재들인 것만 같다. 그게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올들어 친구들을 만날 때면 이런 이야기들을 자주 했었다.
우리 아프지 말고 건강하자. 될 수 있으면 몸이 허락할 때 자주 보자.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가 끝나면 꼭 오사카로 여행을 가자. 술은 내가 사겠다. 10월이 가기 전에 단풍 물 곱게 드는 피아골로 꼭 한번 가 보자. 내가 다 준비할 테니 너희들은 몸만 따라오면 된다.

 나이를 먹은 지금, 동년배끼리 주고받는 '건강하시라'는 인사말의 의미가 더 이상 허투루 들리지 않고, 진심으로 다가와 마음에 새겨진다. 매일 밤 잠들기 전,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이 내일도 모레도 건강하기를 바라는 기도는 더욱더 진실해진다.

 

 오늘따라 자이언티의 노래 '양화대교'가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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