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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쓰기

이젠 좋은 걸 하고 싶습니다만

 딸이 서울로 갔다.
이번에 대학입학을 하게 된 딸은 오늘 기숙사 입사를 하고, 내일 있을 입학식에 참석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서울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딸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PC방으로 달려가 수강신청을 서둘러서 하고는, 아내와 함께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막상 집을 떠나 오랫동안 혼자 지낼 딸을 생각하니, 한주 전부터 뭔가 먹먹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휴가를 낼 생각이 아니었지만, 생각해 보니 안 되겠다 싶었다. 하여 어제 급하게 휴가신청을 하고, 오늘 딸과 아내를 배웅하기로 했다. 
 
 기차의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플랫폼으로 울려 퍼지자, 뒤돌아서서 딸을 살며시 안았다. 평소 같으면 몸서리를 쳤을 딸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내 품에 안기어 주었다.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하던 4살 아이는 이제 풋풋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귀엽고 사랑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차창으로 열심히 손을 흔드는 딸의 모습에서 뭉클한 것이 밀려왔지만, 앞으로 딸에게 좋은 날들이 많이 펼쳐지기를 기도하며 역사를 빠져나왔다.
 
 오늘 저녁, 아내와 딸은 평이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것이며, 뮤지컬 '빨래'를 관람할 것이며, 그럭저럭 괜찮은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될 것이다. 짧지만 기억에 남는 여행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 한 달 전부터 미리 예약을 해두었다. 멀리 떠나는 딸과 수험생 뒷바라지로 고생한 아내를 위한 나름의 선물인 셈이었다. 이에 딸의 반응은 덤덤했지만 아내의 얼굴에선 약간의 흥분과 설렘이 묻어 나왔다. 그런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좋았다.   
 
 역을 나와서 곧장 수영장으로 향했다. 딸을 배웅하기 위해 휴가를 내긴 했지만 어쨌든 오늘은 휴가니까, 좋아하는 걸 하고 싶었다. 수영 강사님께 그동안 교정 코칭을 받았던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습하기로 했다. 자유형 팔동작과 평영 발차기에 미흡한 부분을 지적받아 왔는데, 오늘 반복해서 연습을 하니 조금은 개선되었다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이드 턴을 연습하고 수영을 마쳤다.
수영이 좋다. 수영을 하는 내 모습도 좋다. 또 수영 뒤에 오는 지치고 나른 해진 느낌 역시 좋다.
 
 수영장을 나오니 시간은 12시 30분.
휴가니까, 맛있는 걸 먹고 싶었다. 면을 좋아한다. 짜장면과 우동, 국수, 라멘을 떠올리고는 휴대전화로 검색을 하니 근처에 평이 좋은 라멘집이 있었다. 자리를 잡고 돈코츠 라멘을 주문을 했는데, 5분 정도 지났을까, 내 앞에 돈코츠 라멘이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성격이 급한 나는, 조리속도가 빠른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 맛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간 찾았던 라멘집에선 돈코츠 라멘이 대체로 짰다. 하지만 오늘 들른 라멘집은 육수의 간이 적당했고, 맛은 진했다. 살짝 데친 목이버섯의 양의 제법 많았는데 식감이 좋았다. 차슈가 한 조각 밖에 들어 있지 않아 아쉬웠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점심도 잘 먹었으니, 이젠 스타벅스로 가는 수순이었다.
이어폰을 꽂은 채 바흐를 들으면서, 어제 도착한 강신주 작가의 책을 읽거나, 영어를 공부하다가, 내킨다면 글을 쓸 생각이었다. 스타벅스로 이동하며, 뭘 먼저 할지 떠올려 보았는데, 오늘은 글을 먼저 쓰기로 했다. 노트북을 펼치고, 톡톡톡 자판을 두드린다. 레노버 노트북 자판의 타격감은 정말 좋다.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타격감이랄까.   
아무튼 이렇게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좋다. 오늘은 휴가니까... 오롯이 좋아하는 걸 하기로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오십이라는 나이가 되고 보니,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들은, 할 수 있을 때, 미루지 않고 조금은 서둘러서 하고 싶어 진다.
경제적으로 허락된다면 평소 소유하고 싶었던 것들은 다소 무리해서라도 가지고 싶다. 당장은 후지카메라 X100V, 혼다 슈퍼커브, 어느 화가의 그림 한 점이 전부다.
또 좋은 사람을 자주 만나서 차나 술을 마시고 싶어 진다. 기분 좋게 술을 나누어 마시며 적당한 취기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다.
 
 지난 24년 동안의 직장인으로 삶은 돈과 배움, 성실 등을 가져다주었지만, 생각해 보면 스스로를 눈치와 순종적인 인간으로 길들여져 살았는 지도 모르겠다. 싫어도 해야 했으며, 내가 가진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도 일단은 부딪쳐야만 했으며, 조직 속에서 눈치 보며 요령 것 하지 않으면, 낙인이 찍힌 채 도태할 것만 같은 생이었다. 
짐작컨대, 밥벌이를 즐기면서 하는 부류는 인구의 1할도 채 되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세대의 직장인이라면 대부분 자기를 억누르고 조직에 순응하고 눈치껏 살아왔리라.
또 우리 세대의 상당수가 뭔가 아껴 쓰고 절약하는 것이 미덕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막연한 짐작이라 전혀 다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경우는 부모로부터 그런 철학을 물려받은 것 같다.)
 
 그리하여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이제부터라도 좋아하는 것을 하고, 되도록 좋은 걸 누리며 살자'라는 것이다. 
어쩌면 삶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오래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유한한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그들의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본다면 적어도 천년은 살 것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보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생각보다 짧을 수 있음을 차츰차츰 실감하게 된다. 
 
그러니 좋은 사람과 좀 더 함께하고, 가보고 싶은 곳을 가고, 되도록 좋아하는 일을 하며,
먹고 싶은 것들과 하고 싶었던 일들을, 늦기 전에 해보려 다짐한다.
여건만 허락한다면 되도록 미루지 않을 생각이다.           
 
때마침 아내와 딸이 함께 찍은 사진이 도착했다.
사진 속 대학 교정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어 딸의 입학을 축복하고 있는 듯하고 
아내와 딸은 손을 잡고 벚꽃 송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을 보고 있으니 덩달아 행복이 넘실넘실 밀려든다.
 
딸, 좋은 일들이 봄처럼 피어날 거야.
좋아하는 걸 미루지 마. 지나고 보면 생은 짧으니 말이야. 
삶은 유한하기에 소중한 거잖아.
살면서 문득문득 행복을 찾아내기를 아빠가 기도할 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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