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게으름을 누리고 있는 제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어려서부터 근면성실한 삶이 바람직하다고 배워선지, 지금까지는 대체로 그렇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부지런함이 주는 결과 또한 그럭저럭 만족스러웠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부지런할수록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는 믿음으로, 쫒기 듯 살아가는 동안에도 문득문득 게으름을 꿈꾸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더군요.
'게으름'이란 단어를 Daum에서 검색하니 ‘행동이나 일 처리가 느리고 일하기 싫어하는 버릇이나 성미'라고 나와 있네요. 저는 성격이 급한 탓에 행동이나 일을 미루지 않고 서둘러하는 편이라, 느긋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이런 걸 보면 저는 게으른 성품을 타고나지는 않은 듯합니다만… 뭐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부지런한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부터 느긋하고 행동이 느린 사람들을 대할 때면 좀 부럽더군요. 저런 성격이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할 것 같고, 삶을 살아가는데 여유가 있겠다 싶은 거죠.(물론 느긋한 성격이라고 해서 삶이 편안한 것은 아닐 겁니다.)
타고 난 성정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한 번쯤은 느긋하고 여유 있는 성격으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좀 엉뚱하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게으름’하면 떠오르는 저만의 이미지가 따로 있습니다.
이를테면 멋진 대자연 사이를 걷고 있는 여행자의 모습이나, 질 좋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끝내주는 음악을 들으며 연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좁고 허름한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며 웃고 떠들어 대는 모습, 혹은 아내와 아이들의 밝은 표정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오르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 게으름을 누리고 있는 저만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게으름을 담뿍 누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때면 느긋하면서도 따듯한 기운이 아련하게 밀려들면서, 어쩐지 기분 좋게 사치스럽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눈과 입가에선 몽글몽글 웃음이 피어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 이 정도면 꽤나 호사스러움을 누리고 있는 인생인 거야!’
사실 지금처럼 카페에 앉아 플레이 리스트에 있는 음악을 셔플재생 해놓고, 노트북 자판을 톡톡 두드려대고 있는 모습 또한 게으르면서도 사치스러운 시간이라고 여겨집니다.
‘뭔가 느긋하면서도 시간을 제법 알뜰하게 낭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이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게으름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죠.
저는 가만히 앉아 뒹굴거리는 성격이 못됩니다. 그래선지 뒹굴뒹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제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군요.
저만의 게으름은 아마도 시간과 돈에 구속되지 않은 채 좋아하는 뭔가를 즐기고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 않으며, 느긋하게 좋아하는 것을 사치스럽게 누리는 시간'인 것만 같습니다.
앗!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니요, 이거 써놓고 보니… 뭔가를 누리고 게으름을 좀 피우려면, 역시 돈이 필요하겠군요. 아무래도 돈이 넉넉하다는 건, 좋은 것이 분명하군요.
스물여덟에 직장인이 되었고, 나름 부지런하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사실, 의지를 가지고 부지런했다기보다는 직장인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느 직장인들이 그렇듯 그날그날의 업무를 쳐내려, 조금 일찍 출근해서 그날의 일과를 준비하고, 바지런하고 성실하게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그런데도 조직에서 순간순간 눈치 보며 쪼그라들고 있는 저를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오너가 저를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상사가 마치 오너의 대리인인 듯한 착각을 하기도 하고요. 아마도 저의 성장환경이나 성품 탓일 수도 있고, 과거로부터 답습되고 있는 권위적인 조직문화가 구성원으로 하여금 눈치 보게 만들고 있는 탓이기도 할 겁니다.(물론 요즘은 기업문화나 직원들의 의식도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은근슬쩍 권위를 내세우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상사 앞에서, 이런 조직문화에 일찍이 길들어 있는 저 같은 부류는 무의식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한마디로 말해, 쫄아 버리는 겁니다. 어쩌면 상사가 아니라, 스스로 위축되어, 상사로부터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수시로 자기 검열을 하고 있는 저를 보게 되더군요. 처음에 이를 인지했을 때는 수치스럽고 화가 났습니다.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이구나. 이렇게 길들여져 버렸구나, 그토록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꿈꿔왔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구나'하는 열패감이 들더군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씁쓸하지만 결국은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더군요.
사실, 조직이나 타인은 제게 별 관심이 없을 겁니다. 그것이 자기와 관계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죠.
그런데도 저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우습지요, 타인들은 내게 특별한 관심이 없는데도, 우리는 조직이나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아가니까 말이죠. (젊은 친구들은 타인이나 조직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조직 안에서 스스로 눈치 보는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하여, 저는 언젠가 시스템에서 벗어난 채 저만의 게으름을 누리고 있는 그림을 그려봅니다.
(제가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저를 방출시킬 확률이 훨씬 높겠지만요. ㅎㅎ)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이나 아말피 해안 어디쯤에 머물면서 볕이 좋은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을.
아내와 캐나다 제스퍼에서 한 달가량 머물며 매일 호숫가와 숲길을 나란히 걷고 있는 모습을.
늦은 저녁, 친구들과 오사카나 후쿠오카의 어느 선술집에 앉아 꼬치와 사케를 시켜놓고 낄낄거리고 있는 모습도.
이른 아침 유럽의 소도시를 거닐다가, 동네 빵집에서 흘러나오는 갓 구운 빵냄새와 감미로운 커피 향을 맡으며 미소 짓는 모습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멋진 음악에 취해 살며시 눈을 감고 고개를 살랑거리고 있는 모습도.
수영을 하고 집에 와서, 노곤해진 채로 티브이를 틀어 놓고 까무룩 잠이 드는 모습이 아련하게 일렁입니다.
흐음, 써놓고 보니 역시 돈이 좀 있어야겠군요.
그러니 지금은 부지런히 일을 해야만 하는 시간인가 봅니다.
게으르기 위해 부지런할 수밖에 없는, 모순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허참, 게으름에 닿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 제 모습이라니요.
좀 역설적이긴 합니다만, 언젠가는 저만의 게으름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되짚어보니 저의 게으름의 이미지는 결국, 제가 꿈꾸고 있는 행복의 순간들이군요.
이렇게 게으름 피우고 있는 제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는 것도 팍팍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나름의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점점 가속이 붙어가는군요.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아하는 걸 하고 살아도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겠더군요. 좋은 사람, 소중한 사람과 보낼 수 있는 날 또한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행여, 싫은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저 스쳐 지나갈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게으름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 역설 속에서도,
되도록 소중한 사람들과 좋은 것들을 함께 해야겠다고,
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것들을 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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