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대의 풍광이 마법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낮과 밤이 서로 몸을 섞고 있어서 일까요. 오묘한 어스름의 색채는 업무시간 내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음마저 스르르 풀어놓는군요.
연분홍과 주홍빛이 층을 짓고 있는 하늘 아래서는 잠깐이지만, 그럴듯한 철학자가 탄생하는 법이죠.
묵직하고 과한 물음이 머릿속을 스쳐갑니다.
이를테면 ‘산다는 건 무엇인가?’ 허허.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하자면,
음, 산다는 건 ‘그냥 하루 또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던 시절은 저만치 지나갔으니까요. 어떤 의미를 담기보다는 하루하루 '그냥' 살아가는 거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점점 익숙하고 편한 쪽으로 마음은 기울고, 나만의 방식과 루틴으로 하루가 또 지나갑니다.
세월이 지나가는 걸 문득문득 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땐 ‘이런 걸 두고 나이가 들었다고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50년 정도 살면 세월을 읽어내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시간은 짹깍짹깍 돌아가지만, 삶은 뭉텅 통째 지나가는 것만 같습니다. 돌아서면 하루 일주일, 돌아서면 한 달 일 년이 지나가 있더군요. 삼사 년 전 기억이 엊그제처럼 느껴질 때가 더러 있습니다. 생의 시계는 나이가 들수록 가속이 붙어가는군요.
하루를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혼자고 가끔 가족과 친구가 곁에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뭔가를 이루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젠 혼자라도, 함께라도, 괜찮습니다.
인생은 결국 혼자라는 걸 세월이 일깨워줍니다. 생각하면 조금 외롭고 쓸쓸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사실이 그런 걸요.
한때 삶의 의미나 미지에 대한 의문 혹은 호기심 따위가 생의 큰 동력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의미나 목적보다는, 사는 행위, 그 자체에 더 비중을 두게 되더군요. 의문과 호기심을 품고, 노력은 하되, 가능하면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생은 살아가는 걸까요, 아니면 살아지는 걸까요.
음, 제 경우엔 살아가기도, 때론 살아지기도 하더라고요.
그러니 되도록 걱정일랑 접어두자고요.
살아가기 힘들어도, 어차피 살아는 질 테니까요.
지하철을 탄 80대 할머니가 옆자리에 앉은 70대 할머니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좋은 나이요.' 라고 했답니다.
결국 인생에서 좋은 시절은 '지금'이라는 말이겠지요.
뭔가를 시작하기에 좋은 나이 또한 '지금'일 겁니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시간도 ‘지금’ 인지도 모르죠.
나이 먹고 돌아보면 그때그때 모두 호시절로 느껴지는가 봅니다. 그 호시절이란 돌아갈 수 없는 젊음이 아니겠습니까.
자자, 그러니, 걱정이랑 잠시 미루어둡시다.
좋은 나이에, 좋은 봄날에는, 좋은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미소를 지어 봅시다.
비록 시국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라 해도 말입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도서관 뒷마당에는
찬겨울을 난 목련이 새하얀 촉을 뾰족이 내밀고 있네요.
바로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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