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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쓰기

소문은 흘러 전설이 되고..

 

 옛날 송나라에 원숭이를 기르는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저공이란 본시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워낙 많은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먹이를 대는 일이 날로 어려워졌다. 생각한 끝에 원숭이에게 줄 먹이를 줄이기로 하고 먹이를 줄이면 원숭이들이 자기를 싫어할 것 같아 그는 우선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는 도토리를 아침에는 세 개씩 저녁에 네 개씩 주기로 하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한결같이 화를 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다시 말했다.
 "그러면 너희들에게 주는 도토리를 아침에는 네 개씩, 저녁에는 세 개씩 주기로 하면 어떠하겠는가?"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고 한다.

 

 위의 내용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 "朝三暮四"로 내가 좋아 하는 고사성어 중 하나다. 이 고사성어는 장자 제물편에 나오는 표현으로, 우리는 흔히들 조삼모사라함은 간괴한 꾀로 사람을 속이는 다는 뜻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 고사성어에는 이보다 좀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조삼모사의 참뜻은 '세상의 이치'를 일컷는  말로,

세상의 이치가 이처럼 돌아간다. 혹은 성현이나 세상의 흐름은 우리를 마치 원숭이처럼 흔들어 댄다. 그러니 세상의 등락에 원숭이처럼 일희일비 할 것이 아니라 결국 조삼모사나 조사모삼이나 같은 이야기이므로 스스로 철학을 든든하게 지니고 중심 잡고 살아가자, 라는 뜻이라고 배웠다.   

 

 요즈음 읽고 있는 책 가운데 하나가 '그림자 정부'이고..

 어제는 이와 비슷한 내용인 타큐멘터리 영화 "시대정신(Zeiguist) 1부- The greatest story ever told"을 보았다.

그 다큐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실들이 실은 은유와 소문에 의해서 변질되어졌을 지도 모른다."

 

 사실이 은유로서 표현되면 어떤 사실은 그것을 해석하는 이의 해석에 의해 변질되어 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경'을 들수 있겠다. 모르긴 몰라도 성경은 아마 은유와 사실들로 가득 차있을 것이다. 성경이란 것이 여러 명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지고, 또한 그 표현자체가 은유와 비유로 가득차 있어 해석이 다양하게 나오기 쉽고, 또한 성경이 긴 세월동안 전세계로 퍼져나가면서 번역과정에서 무수한 오류와 오역으로 변질되었을 가능성은 아주 높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성경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창시절 한번쯤 귀속말 게임을 해본적이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선생님이 한문장을 학생에게 전달하면 학생은 차례차례 아주 작게 귀속말로 전달해나가 마지막에 있는 학생이 문장을 큰소리로 말하게 하는 게임이다. 

한사람 한사람은 분명들은데로 사실을 전달했는데 마지막 학생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소리는 영락없이 처음과는 다른 엉뚱한 말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어떠한 사실은 시간을 타고 흘러흘러 은유와 비유 그리고 소문에 의해, 혹은 조작.은폐에 의해, 꾸며지거나 쉽게 왜곡되고 변질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실들은 어쩌면 상당히 변질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렁이었던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뱀이 되었고 그 뱀은 다시 이무기로 그리고 결국엔 여의주를 물고 용으로 승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눈으로 직접보지 않은 대부분의 사실들의 실체를 확인해보지도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령 눈으로 보았다하더라도 그 사실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도 조삼모사의 저공이 싱겁게 웃으며 던져오는 말 한마디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원숭이 꼴인지도 모른다.

작년부터 서서히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던 세계 경제가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다.

이또한 저공이 부리는 조삼모사인지,

혹은 은유와 소문에 의해 왜곡되거나 부풀려져 있지 않은지 가만히 생각해 볼 일이다.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다면...그리고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세상의 이치가 이러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하루를 다부지게 살아갈 일이다.

어쩌면 주어진 시간동안 세상의 이치를 하나하나 주어담아 가는 것이 문제를 애써 풀고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

 

나는 그 누구도 아니다.  

바로 내 세상의 주인인 것이요, 내가 마이크로 코스모스의 주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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