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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휴가

처음부터 연차휴가를 쓸 생각은 아니었다.

회사의 권유도 있고 해서... 월요일 하루 연차휴가를 내기로 했다.

휴가~

언뜻보면 설레이는 단어이지만...

10년차 직장인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별반 특별할 것 없는, 어쩐지 식상하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만 같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길고 여유로운 개념이라기 보다는 

여름에 고작 3,4일 정도 쓰는 짧은 기간이라... 웬지 휴가를 떠올리면 너그럽고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조급한 마음이 되어 이 짧은 기간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휴가란 이런 쉴 휴(休), 틈 (暇)를 쓰는 이런 단어의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 

오히려 휴가는 쉬는 개념이 아니라 뭔가를 하지 못해 안달하는 그래서 더 바쁜 시간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여간 정말 그냥 하루 쉰다는 느낌(물론 휴가의 작은 일정은 준비를 해두었다)으로 

월요일 아침, 평소보다 30분쯤 늦게 눈을 뜬다. 

 

가족들이 아직 자고 있길래 다른 방으로 자리를 슬며시 이동해서는

평소 출근시간에서 차에서 듣던 라디오 방송을 아직 잠이 덜가신 눈으로 침대에 누워 듣고 있으니,

일찍 잠이 깬 딸아이가 베시시 웃으며 내 옆으로 파고 드는 것이다. 아이를 따라서 행복도 함께 내 가슴팍으로 부터 온몸으로 스며든다. 아이를 꼭 안아 주고 20분정도 지나자 아내가 피곤한 얼굴로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연다.

그렇게 아주 짧은 휴가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11시 20분, 딸아이는 유치원을 갔고.. 작년 11월에 태어난 아들에게 분유를 먹이느라 아내가 분주하다. 12시가 넘으면 아기를 봐주는 아주머니가 올것이고 그러면 아내도 일을 하러 나갈 것이다.

점심을 집에서 먹고 나갈까 생각하다가 친구놈에세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친구놈은 회의 중이라며 목소리를 낮춘다. 이미 밖으로 나갈 준비는 한 참이라, 친구와 약속은 안된 상태에서 그냥 집을 나섰다. 

거리에는 목련들이 하나둘 새하얀 봉우리를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봄이 익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봄! 월요일, 짧은 하루동안의 휴가계획의 출발은 이랬다.

오전에 집에서 책을 좀 읽다가 12시에 친구를 만나 점심을 함께 먹던지.. 아니면 12시 5분에 시작하는 영화를 보던지.. 둘중 하나였다.

 

집을 나서며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회의 끝나면 전화줘.."

 

11시 50분, 발걸음은 어느새 극장에 도착했고, 친구놈에게 아직 전화는 오지 않는다.

극장 매표소 앞은 한산하다 못해, 어쩐지 적막한 느낌까지 든다. 아직까지 친구놈에게서 전화는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는 거다. 아침도 대충 챙겨 먹었기에 패스트푸드점으로 가서 햄버거 세트메뉴를 사들고 매표를 했다.

"워낭소리요"

"몇 장 드릴까요?"

"1장 주세요."

 

햄버거를 사느라 4분 정도 늦게 극장으로 들어갔다.  이미 영화가 시작하고 있다.

자리에 앉는데 화면에서 연신 딸랑딸랑 워낭소리(소방울 소리)가 울려 퍼진다.  

동시에 앞자리에 중년의 아주머니 4명이 나란이 앉아 영화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하는 소리도 울려퍼진다. 

 

극장엔 워낭소리보다 더 수다스런 아주머니 4인방과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월요일 12시의 극장풍경이란 이런거다.

아참... 내가 햄버거를 주섬주섬 먹고 있을 때, 나보다 늦게 들어온 젋은 아가씨 2명이 들어왔다.  

 

햄버거를 먹느라 집중이 잘 안된다. 나 역시 부시럭 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이 아주머니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순한 했지만 그래도 앞자리에 앉은 아주머니 4명은 차원을 더 뛰어 넘는 것이다.

4인방은 영화를 보는 내내 마구 떠들어 댄다. 그 중에 한 아줌마의 가방에서 휴대폰 멜로디가 크게 흐르고 그 아주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큰소리로 통화를 한다.  

기분이 조금씩 나빠지려고 했지만.... 햄버거를 극장에 반입해서 먹었던 내가 기분이 나쁘다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라.. 함안 어디쯤에서 동창생들이 10년만에 만나 영화를 봐서 정신이 없는가 보다라고 생각을 하며, 아줌마 4인방들이 자칫 소중한 휴가 기분을 망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기로 한다.

그래도.. 아주머니 4인방은 좀 심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전평을 날려댄다.

에이... 그냥 우시장에 팔려나온 소들이라고 생각하자!! 

 

1시 50분.. 영화는 그럭저럭 볼만했다. 극장을 빠져나올때 암소 4인방은 벌써 팔려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극장을 나와 교보문고로 향했다. 어떤 책들이 새로 나왔나 30분 정도 책장을 뒤적거리며 다녔다. 그리고 나서 곧장 수영장으로 향했다.

 

월요일 오후 2시 30분, 시민생활체육관! 

수영장은 극장처럼 한산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주말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면 수영하는 것은 약간에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일이 자주있었기 때문에 널널한 pool을 보자 여유가 밀려왔다.  

수영을 하면서도 레인 하나를 고작 두 세사람이 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건 뭐 진시황이라도 된것처럼 굉장한 호사를 누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되었다.

그렇게 사치를 즐기며 가벼운 마음으로 매끄럽게 물살을 가르며 2천미터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뼈속까지 상쾌해 졌다. 산뜻한 기분으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봄햇살처럼 느슨하게 걷는 것처럼 보였다.  

 

햄버거를 점심으로 먹어서 그런지... 또.. 수영을 한 뒤라 배가 고팠다.

한 그릇에 2천원하는 중국집을 알고 있어.. 기분 좋게 짜장면을 먹었다. 요즈음 짜장면이 2000이라니.. 크크 먹으면서 가격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그릇 바닥에 남아 있는 마지막 면가락 하나까지 싹싹 긁어 먹고

 

생각해두었던 대로 별다방(스타벅스)로 향했다. 원래 커피를 즐기지 않아 커피숍으로 갈 일이라고 해봐야 1년에 두 서너번이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생각하니 웬지 모르게 사치스러운 시간을 살고 싶었다.

프론터에서 메뉴판을 보고 한참을 서있었다. (커피를 즐기지 않으니 뭘 먹을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카페 목화를 시키고 구석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고 커피를 홀짝거렸다.  

하지만 카페목화는 너무 달았다. (담에 오면 그냥 커피를 주문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이름이 멋있어 보이길래 에스프레소를 시켰다가 엄청나게 쓴맛에 화들짝 놀란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또 이 모양이다)

그래도 기왕 비싼 커피를 주문했으니 폼나게 책장을 넘기며 홀짝홀짝 들이켜 본다.

물론 다 먹진 못했다. 너무 달아서..

 

별다방에서는 1시간 40분 정도 책을 읽었다.

사실 커피보다도 책을 읽으려고 이렇게 넓은 공간을 찾아 든것이라

커피보다는 책읽는 것에 몰두했다면 3천 6백원의 커피값 이상은 한것일 것이다.

시간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하질 않던가?

역시 시간을 알차게 살아내는 것은 비싼 커피보다도 더욱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5시 45분, 아내와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지자 책을 읽었다는 뿌듯한 마음이 되어 별다방을 나섰다.  

 

6시 10분, 아내가 가르치는 학생 집에서 딸아이 자전거를 주겠다고 해서 백화점에서 딸기를 사들고 갔다.

바람 빠진 자전거를 힘겹게 밀고, 자전거 판매점으로 가서 공기를 주입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전거를 약간 손보고, 세제를 풀어 씻었다.

올 여름쯤에는 아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켜 주리라..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7시 40분, 저녁을 먹은 후 

딸 아이와 운동을 하러 나갔다. 아이가 그렇게 좋아할 줄이야..

달리기를 하며 까르르 웃는 아이의 표정 속에서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8시 20분, 산책을 할겸 해서 홀로 시장으로 족발을 사러 갔다.

요 며칠 전부터 저녁 봄바람이 상쾌했는데 가로수가 줄지어 서있는 밤 길을 걷노라니 기분이 좋았다.    

근데 20분정도 걸었더니.. 피곤이 몰려든다. 생각해보니 오늘 제법 많이 걸었던 거다.  

간만에 TV 뉴스를 틀어놓고 (족발을 안주로 해서) 맥주를 맛있게 먹었다.

 

밤 10시, 아이들은 이제 잠이 들었고,  

아내는 인터넷으로 메일을 확인하고 있다.

나는 브라질 음악을 리메이크한 "RED HOT + RIO" 앨범을 틀어놓고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읽었다.

 

밤 12시. 침대에 누웠는데 아내가 딸아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내 입가에 미소가 돈다.  

 

그리고 가만히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우연찮게 쓰게된 휴가,

오늘 이 하루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참 여유롭고, 사치스럽고, 보람된 휴가라는 생각을 하며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했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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