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색 쓰기

내 맘도 몰라주고

몇 해 전 일이다. 저녁을 차리던 아내가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걱정이 되었지만 하던 대로 그저 짧고 무심하게,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만 했던 것 같다.

다행히 며칠 뒤 아내의 허리는 회복되었지만, 빨래를 개다가 아내는 한숨을 쉬더니 그날의 내 말투와 표정에 몹시 서운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뾰족하게 날 선 목소리로, 아직까지 당신은 허리가 아픈 적이 없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한 번이라도 아파보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을 거라고 하며,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래, 언제가 허리가 한번 삐끗해 봐라. 그러면 지금 내 심정을 알게 될 거야. 그때는 나도 똑같이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그냥 병원이나 가보라고 해야지."

아내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채 내 얼굴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아뿔싸! 순간 몹시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아!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어쩌자고 나 밖에 모르는 것일까.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됐느냐? 어디 누워 봐라. 파스라도 붙여주겠다,라고 말해야 했던 것인데... 자상한 표현이 서툴고, 겉보기에 인정머리 없어 보이는 모양새라, 내 성격을 잘 아는 아내라도 이따금씩 서운함을 토로할 때가 있었다.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아직까지 아내의 원망처럼 내 허리가 탈이 난 적은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아내의 말처럼 지금까지 허리가 아파 고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선지 누군가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 내가 겪은 다른 통증에 비추어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그로 인해 따라오는 불편과 짜증의 생생한 느낌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스스로 겪어 보지 못한 일들은 대체로 이러할 것이라 짐작해 본다. 설령, 직접 경험했다 하더라도 처음의 생생한 느낌은 하루하루 시간에 의해 희미하게 퇴색되고 있어, 내 앞에 있는 상대가 처한 아픔에 대해 그저 추측하고, 애써 짐작만 할 뿐, 내 것처럼 와닿지 않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적어도 나라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렇다는 말이다. MBTI를 보더라도 타인에 대한 공감이 많이 떨어지는 유형이다. MBTI가 어떤 유형인지 묻지 마시라. 그저 고약한 성격이라고만 해두자.)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타인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해하거나, 나아가 공감까지는 어찌어찌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앞에 있는 상대의 심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것이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적어도 나라는 인간은)

 

아내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리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아파하고 있을 때 자칫하면 마주하고 있는 상대의 말에,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서, 서운한 감정을 느끼기 쉬울 것 같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생각 두 가지.

 

하나,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표정이나 말투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보자. 만약 그들에게서 뭔가 다운된 기운을 감지한다면 조심스레 다가가서 가만히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하자.

(쉽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나라는 인간은) 

 

둘, 타인의 아픔이나 상처를 오롯이 이해하고 공감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이는 뒤집어 보면, 내가 지닌 아픔을 타인이 송두리째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상대가 내 맘 몰라 준다며 공연히 서운해하지 말자.  

 

지난주부터 느닷없이 우울감이 찾아들었다. 여태껏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게 뭔가? 갱년기? 우울증? 직장생활의 권태?

그리하여 습관처럼 아내에게, 또 친구들에게,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우울감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자상함이 부족한 내가 푸념이라도 하면 한결같이 제 일처럼 들어주고 걱정해 주는 아내,    

곰돌이 푸우에 나오는 당나귀 이요르처럼, 자기는 그전부터 이런 증상을 겪고 있다며 함께 푸념을 해대던 친구, 

꽤 긴 시간,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으며 세심한 질문을 던지고는 조심스럽게 분석을 하고 공감하던 친구,

지금 우리 나이에는 다들 너처럼 그렇다며,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같다고, 그런 기분은 잠시 잠깐이고, 이 또한 다 지나간다며, 걱정할 것 없다며 상투적인 위로의 멘트를 날렸던 친구.

 

내 울적한 심정이 그들에게 그대로 전해졌을까?

사실, 나조차 내 마음이 왜 이런 지 종잡을 수 없는데, 나와 가까운 이들이라고 내 마음을 알 수 있을까?   

그러니 때론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스스로도 잘 모르는 마음을 하물며 타인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하나하나 고마운 얼굴들이라는 생각이 더 선명해졌다.

적어도 내 곁엔, 울적한 기분을 아무렇게나 던져도, 싫든 좋든 받아 줄 아내와 친구가 있다는 말이니까.  

 

좀 냉혹하긴 하지만 이렇게 정리하기로 한다.

일렁이는 당신의 아픔은 아무도 모르고 

당신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주는 고통은 오로지 당신의 것이니

이제부터 공연히 내 맘 몰라준다며 서운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하자.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해 보기로 하자.    

 

난생처음 생뚱맞은 우울감이 찾아들었다.

어쩌면 허리가 안 아픈 대신일지도... 

 

 

'사색 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때는, 이제는  (0) 2022.06.09
척척 살아간다  (0) 2022.05.10
The show must go on  (0) 2022.04.23
선거에 대한 단상  (0) 2022.02.22
나이 오십  (0) 2022.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