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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과 나

살다보면 한 해에 한두 번쯤, 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은 그런 날이 있다.
요 며칠이 그랬다.
그러면서,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어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어른이라는 수식에 대해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어른이니까,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중년인 사내가 어디선가 엉엉 울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몹시 부끄럽고, 당혹스러운 느낌이다. 
결국, 목 놓아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하는 날들은 다시 오겠지.
 
아! 울고 싶은 이 순간, 속시원히 울어 버릴 수 있다면 가슴 한켠이 시원해질 것만 같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love theme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스물세 살의 가을밤.
생일선물로 받은 '시네마 천국' OST를 반복해서 틀어 놓은 채, 실연 같지 않은 실연에 펑펑 울어대던 내 모습에 씁쓸한 웃음이 돈다. 감상에 젖은 채, 내키는 대로 펑펑 울 수 있었던 스물셋이 문득 그립다.    
아프면 거침없이 울 수 있는 것이 청춘이요,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하는 것이 어른이 아닐까. 
 
샘솟는 감정을 마구 휘둘러대던, 울적하고 답답했던, 그래서 혼자 울곤 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소설 '백경'의 주인공 이슈메일과 내 모습이 오버랩된다.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 중,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백경'(모비 딕)이라고 말할 것이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개인적으로 '가장 대단하다'라고 여겨지는 소설이지, 가장 훌륭한, 가장 재미있는, 가장 감동적인 소설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두기 바란다. 단어를 조금만 바꾸어도 그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법이니까.
아무튼 내게 있어 '백경'은 '대단하다', 그러니까 영어로 'great' 내지는 'amazing'이라는 표현에 딱 맞아떨어지는 소설이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 해두자. 몇 년 전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났고, 뭍에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으므로,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내가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늘 쓰는 방법이었다. 입 언저리가 일그러질 때, 이슬비 내리는 11월처럼 내 영혼이 을씨년스러워질 때, 관을 파는 가게 앞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추거나 장례행렬을 만나 그 행렬 끝에 붙어 따라갈 때 특히 심기증에 짓눌린 나머지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의 모자를 보는 족족 후려쳐 날려 보내지 않으려면 대단한 자제심이 필요할 때 그럴 때면 나는 되도록 빨리 바다로 나갈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모비 딕, 작가정신 김석희 역)
 
 젊은 시절, 한 번쯤 느꼈을 방황과 고독, 고민 따위들이 깊이 스며든 듯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묵직한 도입부는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다'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광기 어린 독재자, 외다리 선장 에이헙과 그를 따르는 선원들이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 신과도 같은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 딕'을 잡기 위해 망망대해를 떠다닌다는 소설의 스토리는 단순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백경'이 가지고 있는 대단함이란 단순히 스토리를 타고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느꼈던 '백경'의 '대단함'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기란 상당히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소설의 서사 너머에서 넘실거리고 있는 대단한, 뭔가가 분명히 있다'라는 정도로만 말해두자.   
 
때로는 시적인 느낌마저 들며, 등장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엄청난 묘사, 출항 전 과정에서부터 고래를 잡고 기름을 짜는 과정들의 아주 세세한 묘사와 수많은 고래의 종류에 대해 마치 백과사전과도 같은 설명은 독자를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또 소설을 관통하는 은유와 상징이 주는 무게로 인해 이미 초반부를 읽어나가면서 독자는 이미 숙연한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러다가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와 스토리가 흐를수록 에이헙 선장의 광기와 집요함에 대해 압도당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데, 무조건적인 복수심을 온통 둘러쓴 채 미친 듯이 모비 딕을 쫓는다는 이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서 이렇게 방대한 양의 글을 썼다는 것에 대해 짓눌리듯 놀라게 되는 것이다. 
젊은 시절, 실제 배를 탔던 작가 '허먼 멜빌'의 경험(그는 스무 살 무렵 상선과 포경선의 선원이었다)에 상상력이 더해지며, 끝도 없이 아득한 결말을 향해 이토록 막중한 글을 밀고 나가는 작가의 집중력과 에너지에 대한 경외감마저 들었다. 집요하게 소설을 완성시켜 나간 작가 허먼 멜빌과 '에이헙 선장'은 어쩌면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마침내, 백경을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되면 이 소설의 중압감에서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드는 생각은 '이 소설은 분명히 대단한 작품임에 틀림없다.'라는 것이었다. 그 외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백경'을 처음 접한 것은 내가 국민학생(초등생)이었던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쯤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아동도서 출판으로 유명했던 '계몽사'의 문고 전집을 통해서였다. 전집 120권 중에서 제1권이 바로  '흰 고래 모비딕'이 있었는데, 비록 전집의 제1권이었지만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 탓에 줄곧 책장에만 꽂혀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이 되어 영화관에서 보았던 코미디 영화 '메이저리그'에서 포수 제이크 테일러(톰 베린저)의 애인인 린 웰스(르네 루소)가 제이크에게 백경은 읽어봤냐고, 두 번이나 물었을 때 제이크가 우물쭈물 변명을 하며 아직 못 읽었다고 대답하는 장면과 영화 종반부에서 제이크가 백경을 읽고 있는, 혹은 다 읽었다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어떤 소설이길래, 아니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기에 이렇게까지 영화 모티브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그 후에도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면 종종 '백경'이 언급되는 걸 볼 수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영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모르긴 몰라도 훌륭한 소설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언젠가 제대로 백경을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나는 어정쩡한 대학생이 되어 있었고, 우물쭈물 1학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오늘처럼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무렵으로 기억한다. 문득 대학생이라면, 교양필독서 정도는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구입하게 된 책이 바로 학원사에서 출간한 문고판 '한 권의 책' 시리즈 '백경'이었다. 
'한 권의 책' 시리즈로 말할 것 같으면, 크기가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였는데, 책 속에는 말 그대로 깨알만 한 글자들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문고판 책으로 세계의 고전 소설이나 수필 등을 문고판으로 내놓고 있었다. 책을 읽을 때 무게가 가볍고 크기가 작아 손에 들고 읽기 편한 장점이 있었지만, 한 페이지에 실린 글이 너무 작고 빡빡하게 담겨 있어, 읽기가 불편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은 가격이었는데, 권당 가격이 1500원에서 2000원 정도여서, 당시 시중에 출간된 책 가운데 가장 저렴한 축에 속했다. (이는 범우사의 문고판 시리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유로 책장에는 범우사의 문고판 책이나 학원사의 한 권의 책 시리즈가 제법 꽂혀 있었다. 
 
아무튼 백경 1권, 2권을 야심차게 구입하고 책을 펼쳤지만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이 소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깨알 크기로 빡빡하게 들어찬 활자를 보는 순간 답답함이 밀려들었고, 거기다 엄청난 페이지 수에 기가 눌려선지 집중력은 떨어지고 마음이 자꾸 산만해졌다. 또한 '백경'은 스토리 위주의 가독력이 뛰어난 소설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쉽게 읽히는 그런 소설이 아니라는 말이다. 더군다나 그때까지 이렇게 두꺼운 분량의 책은 단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집중해서 읽기가 꽤나 어려웠다. 
순간순간 포기하고 싶었지만,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이 소설을 계속 붙들고 있었다. 하루 10 페이지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집중하려 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머릿속은 쉽게 산만해졌다. 그렇게 '백경'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대학 1학년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개학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때까지 읽은 ‘백경'은 억지스럽게 1권의 삼분의 일 정도였다.
그리고 1993년 4월 2일, 논산훈련소로 입대를 했다. 훈련소에서 6주를 보내고, 전방 부대로 자대 배치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모든 신병이 그렇듯 중대장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중대장은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묻더니,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혹시 사회에 있을 때 아쉬웠던 점이나 후회스러운 것이 있는가를 물어왔다. 이 질문은 갑작스레 애인이 변심했다거나 사회에 대한 특별한 미련이 남아 혹시라도 모를 탈영의 위험을 알아차리기 위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내 대답은 엉뚱했다.
 
중대장:  정창욱 이병, 음, 혹시 사회 있을 때 못했던 것이나 후회되는 것이 있으면 말해봐. 
       나:  (잠깐 생각하고는) 이병, 정창욱! 백경입니다! 사회에 있을 때, 소설 백경을 마저 읽지 못하고 온 것이 아쉽습니다!
중대장:  (뭐......? 백경? 뭐야, 이 놈은?) 음...... 백경. 그래, 나중에 시간 나면 꼭 읽어 보도록 해.
       나:  네 알겠습니다!              
중대장:  (별의 별놈을 다 보았지만, 이건, 또 다른 놈이구만. 그나저나 여기서 책을 읽는다고..... 음, 어려울 텐데...... ) 

이후 지옥과도 같은 6개월이 지나가고, 나는 일병이 되었다. 이제 일병이 되어 고작 할 수 있는, 계급의 특권을 부린 일이, 부대 내에 있는 공중전화로 달려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책장에 있는 '백경'을 보내달라고 한 것이다.
집으로부터 소포가 도착하고 선임병들의 눈치를 보며 틈나는 대로 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군대에서는 하절기가 되면 점심식사 뒤엔 오침 1시간이 주어졌는데, 나는 낮잠을 대신 숨죽여 '백경'을 읽었다. 역시 '백경'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소설의 삼분의 일 정도가 지나가자, 탄력이 붙으며 가벼운 재미도 느끼면서 점차 몰입이 되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해 여름의 끝자락 즘에는 '백경'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두꺼우면서 어렵게 느껴지는 글을 읽어 본 적이 없었는데, 드디어 책을 다 읽고 말았다는 뿌듯함과 마음 한 구석에 그때까지 읽지 못했던 '백경'에 대한 부채의식이 떨어져 나가며, 개운함과 동시에 약간의 찌릿한 전율마저 느껴졌다.
책 표지를 살며시 덮으며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까지 시원하지 않고, 뭔가 찝찝한 느낌을 주는 이 소설에서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이 긴글에 들어있을 의미와 상징은 뭘까.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삶의 깊이가 미천한 탓인지, 이해력 탓인지, 어렴풋한 해답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다시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아직 이 소설의 깊은 뜻은 잘 모르지만 분명한 건, 이 소설은 대단하다는 것이다. 또 이런 글을 기필코 완성해낸 허먼 멜빌 또한 엄청하게 집요하면서도 대단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선 난생처음 두꺼운 책을 읽어냈다는 자부심이 일렁일렁 밀려들었다. '백경'을 읽어냈으니, 이젠 그 어떤 책도 읽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올라왔다. 
세월은 흘러, '백경'보다 더 두꺼운 책을 읽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한 일은 아니게 되었다. 그보다는 세상살이의 두께를 넘기 힘들 때가 더 많다는 걸, 여전히, 아직도, 체득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몇 주전, 넷플릭스에서 영화 '더 웨일'을 보았다. 
영화에서는 '백경'이 계속 언급되며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었다. 연극을 원작으로 하고 있어, 인물과 공간에 대한 집중도가 높았고, 절정으로 치닫는 결말은 긴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나는 책장 한 구석에서 매일 푸석푸석하게 늙어 가고 있는 문고판 '백경'을 꺼내보았다.
표지는 누렇게 바래 있었고, 낱장들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푸석거렸으며, 아니나 다를까,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 속에 좁쌀같이 작은 글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작은 활자를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 조금은 신기했다. 지금 다시 보니 노안으로 인해 글이 흐릿하게 보였고 빼곡히 들어찬 깨알 글에 안구가 뱅뱅 돌아갈 것만 같았다. 바야흐로 늙어 버린 것이다.        
책장을 몇 장 넘기자,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진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침시간에 책 읽는 걸 들킬까 봐, 숨 죽여 책장을 넘겼던 스물한 살, 그 여름의 기억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다시한번 백경을 읽고 싶어 졌지만 이내, 지금의 여유로는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팍팍한 직장생활을 하며 무겁기만 한 '백경'을 읽어낼 자신이 없었다.
다른 한편에선 당장은 읽긴 힘들겠지만, 이참에 제대로 된 '백경'을 소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주문한 '백경'이 도착했고, 나는 사뭇 경건한 마음으로 조심스레 표지를 넘겼고, 첫 문장을 조심스레 읽어 보았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 해두자. 몇 년 전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났고, 뭍에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으므로,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내가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늘 쓰는 방법이었다. 입 언저리가 일그러질 때, 이슬비 내리는 11월처럼 내 영혼이 을씨년스러워질 때, 관을 파는 가게 앞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추거나 장례행렬을 만나 그 행렬 끝에 붙어 따라갈 때 특히 심기증에 짓눌린 나머지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의 모자를 보는 족족 후려쳐 날려 보내지 않으려면 대단한 자제심이 필요할 때 그럴 때면 나는 되도록 빨리 바다로 나갈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에게는 권총과 총알 대신이다. 카토는 철학적 미사여구를 뇌까리면서 칼 위에 몸을 던졌 지만, 나는 조용히 배를 타러 간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다를 알기만 하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는 바다에 대해 나와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될 것이다.”(모비 딕, 작가정신 김석희 역)
 
첫 문장을 가볍게 소리 내며 읽기 시작하자, 스무 살의 고민 많던 내가 이제 쉰 살이 된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왔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이제 젊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성긴 머리숱과 탈모로 넓어진 이마와 굵게 패인 주름진 사내의 얼굴이 멋쩍게 웃고 있었다.      
 
영화 '더 웨일'의 주인공 찰리는 울혈성 심부전으로 인해 죽을 것 같을 때면, 매번 그의 딸이 어린 시절 썼던 백경의 독후감을 읽어 달라고 애원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다리 하나가 없고 어떤 고래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 고래의 이름은 모비 딕. 흰 고래다. 내용이 전개되면서 에이헙은 많은 난관에 직면한다. 그는 평생을 그 고래를 죽이는 데 바친다. 안타까운 일이다. 고래는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자길 죽이려는 에이헙의 집착도 모른다. 그저 불쌍하고 큰 짐승일 뿐.
에이헙도 참 가엽다. 그 고래만 죽이면 삶이 나아지리라 믿지만 실상은 그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될 테니까. 
난 이 책이 너무 슬펐고 인물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고래 묘사만 잔뜩 있는 챕터들이 유독 슬펐다. 
자신의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배려인 걸 아니까. 이 책을 읽으며 내 삶을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돌이켜 보면, 나 또한 에이헙 선장처럼 스스로가 믿는 극한 감정에 사로잡혀 살았던 때가 있었다. 
나의 이십 대는, 도무지 생은 갑갑하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았고, 안개가 자욱한 앞 날이 무섭고 끝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내내 막막했던 기억들로 점철된다. 내 잘못이 아닌 일로 비난을 받을 때면 에이헙처럼 누군가를, 혹은 세상을 죽도록 원망하며 삶을 소진했던 때가 잠시나마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감히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꿈을 꾸며 에이헙 선장처럼 병적인 집착을 했지만, 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 채 번번이 쓰러질 때면, 아무 감정 없는 고래에게 끝없이 원망을 해대던 에이헙 선장이었던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젠 알 것도 같다.
고래가 에이헙 선장에게 감정이 없듯, 세상도 내게 이렇다 할 감정이 없다는 걸. 오히려 세상에 이런저런 감정을 품은 건 나였다는 걸 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되돌아보면 미세하게나마 나아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다. 
돌이켜 보건대, 30년 전 스무 살, 20년 전의 서른과 10년 전의 마흔, 그리고 오십을 맞은 지금, 스스로를 살펴보면 크게 변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때 그 시절의 나보다 미약하게나마 나은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에 안심하게 되고,
낯뜨겁지만 조금은 스스로가 대견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지난 30년을 돌아볼 때 괄목상대 하진 않았지만, 짜내듯 ‘다행과 대견’을 발견하고 안심하는 것은 이제 안분지족을 아는 나이에 들어섰음을,
그리고 겸손이 겨우 몸에 깃들기 시작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엉엉 울지는 못하지만
영화 '화양연화'에서 왕코르 와트의 벽에 난 구멍에다 비밀을 속삭이던 양조위처럼 
나는 벽에 난 구멍에 대고 갸녀리게 속삭이듯 속삭이듯 펑펑 울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직은 아이였던 스물 세살, 그 시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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